[제33기왕위전] 유창혁-이창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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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제1보 (1~22) =비 쏟아지는 아침. 중부권을 강타한 수재로 세상이 요란하던 지난 2일, 홍익동 한국기원에선 조용히 왕위전 도전기 첫판이 시작됐다.

왕위 이창호9단은 언제나처럼 수수한 노타이 차림, 도전자 유창혁9단은 화려한 황색의 개량한복. 돌을 가리니 도전자의 흑번이다.

대국 개시를 선언하고 나오면서 입회인 양상국8단이 "하늘이 무너져도 바둑은 두나" 하고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다.

일본의 히로시마 (廣島)에선 1945년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바로 그날 본인방전 도전기가 두어졌다.

하얀 광선이 번쩍하고 터졌다.

모두 밖으로 나가 풀밭에 엎드렸다고 당시의 관전기는 전한다.

교외라서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6.25가 터진 이틀 뒤에도 경성기원에선 시합이 한창이었다.

포성은 은은한데 노국수들은 대국장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얘기를 나누며 대국을 지켜보는데 劉9단이 흑5, 9로 연속 눈목자를 두는 바람에 한담은 끝났다.

흑9는 필시 준비된 수일 것이다.

그걸 직감하며 李왕위는 고심하더니 아예 손을 빼 10으로 둔다.

'가' 의 수비면 온건하고 손뺀 10은 강수다.

李왕위는 11의 돌입엔 12로 맞설 예정이다.

劉9단도 12를 예상한 듯 불과 1분 만에 13으로 치받아버린다.

한동안 이 부근의 변화는 '참고도' 가 약속처럼 두어지곤 했으나 최근 들어 실전과 같은 사나운 수순이 인기를 끌고 있다.

19로 틀어막고 보니 흑5로 한칸이라도 더 벌린 이유를 알 것 같다.

여기서 李왕위의 대장고가 이어졌고 결국 17분 만에 20, 22의 험악한 변화로 나섰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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