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무죄판결 의미] 정책판단 잘못 처벌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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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환위기의 책임 소재를 놓고 1년 넘게 벌여온 법정공방은 1차적 사법판단에서 사실상 '무죄' 쪽으로 결론이 났다.

강경식 (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金仁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해 부당대출 압력 혐의가 일부 인정됐지만 외환위기 초래 책임 등 핵심 쟁점 모두가 무죄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경제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박에 시달려온 재판부지만 결국 순수한 '법리적 판단' 을 선택한 셈이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밝힌 무죄 이유의 요지는 "피고인들이 조속히 국제통화기금 (IMF) 행을 결정하지 못한 점을 탓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고의로 외환위기 실상을 은폐.축소보고했다는 증거가 명백하지 않다" 는 것이다.

즉 직무유기죄를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의도적으로 직무를 방임하거나 포기한 경우' 로 엄격히 해석해온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82년 의령 총기난동사건 당시 사건을 막지 못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경찰서장과 88년 영등포교도소 재소자 탈출사건과 관련, 기소된 교도소장에 대해 "고의성이 없다" 며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공무원의 정책판단 오류에 대한 형사처벌을 재판부가 '불가 (不可)' 쪽으로 결론냄으로써 공직사회에 상당한 '힘' 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 정부 들어 진행 중인 각종 구조조정과 관련, 경제담당자들이 앞으로 소신있는 정책을 펼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준 셈이 됐다.

그러나 '정책책임자의 어떤 판단도 법률적으로는 무죄' 라는 식의 면제부를 준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검찰로선 상급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아내지 않는 한 외환위기에 대한 국민적 공분 (公憤) 을 돌리기 위해 무리한 기소를 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판결로 외환위기 책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어렵게 내려졌지만 근본적 원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는 자조적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물론 검찰 수사는 6.25 이래 최대의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외환위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정부의 외환위기 대처과정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밝혀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정 최고책임자였던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을 제외한 채 사실상 반쪽의 진실을 밝히는 데 그쳤으며, 외환위기의 또다른 원인제공자인 전직 관료들에 대해선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법조계 주변에선 "비슷한 시기에 환란을 당한 다른 나라들의 경우 정책책임자와 경제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논의하는 동안 우리는 검찰 수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게 잘못" 이라며 "문제의 원인에 대한 논의가 먼저 이뤄졌어야 책임도 제대로 추궁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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