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육상] '질투는 나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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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22)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4m70cm를 넘고 내려오면서 가슴에 걸려 바를 떨어뜨린 순간이었다. 빨강 점퍼에 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우아한 레이스'를 즐기던 그였다. 그러나 한 순간 상황이 급반전했다.

▶ 이신바예바가 금메달 획득은 물론 세계신기록까지 세우자 기쁨에 겨워 전율하고 있다. [아테네 AP=연합]

팀 동료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스베틀라나 페오파노바(24)는 4m70cm를 여유있게 넘었다. 이신바예바가 2차 시기에서 4m70cm를 넘더라도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시기 차로 금메달을 페오파노바에게 넘겨줘야 한다. 이신바예바는 5cm를 높여 4m75cm에 곧바로 도전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이신바예바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페오파노바는 보란 듯이 4m75cm도 넘었다.

마지막 3차 시기. 장대높이뛰기는 연속 3회 실패하면 끝이다. 이신바예바는 4m80cm를 신청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더니 단정히 정리한 뒤 다시 묶었다. 시커먼 송진 가루를 손에 잔뜩 묻힌 뒤 바를 잡았다. 주문을 외듯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 아테네 밤하늘을 쳐다봤다. 힘찬 도약 후 장대가 크게 휘는가 싶더니 하얀 두 다리가 하늘을 향해 한번 더 뻗어 올랐다. 바를 건드리지 않고 낙하하면서 그녀는 크게 환호했다. 5만 관중의 함성과 박수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페오파노바가 '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신바예바를 노려보는 장면이 전광판에 비쳤다.

이신바예바는 여세를 몰아 4m85cm도 거뜬히 넘었고, 페오파노바는 4m80cm와 4m85cm에서 잇따라 실패했다. 마지막 역전을 노리고 도전한 4m90cm에는 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24일 오후 10시(현지시간)에 시작된 여자 장대높이뛰기 결승전은 날짜를 하루 넘겨 25일 0시10분에야 끝났다. 지난해 7월 이후 8차례나 세계기록을 주고받은 라이벌 대결다운 최고의 명승부였다. 눈은 울고, 입은 웃으며 이신바예바가 러시아 국기를 들고 트랙을 돌았다. 페오파노바도 경기 내내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피날레가 남아 있었다. 모든 부담을 훌훌 벗어버린 이신바예바는 자신의 최고기록이자 세계기록인 4m90cm보다 1cm 높은 4m91cm에 바를 걸어놓고 우아한 도약으로 세계기록을 바꿔놓았다.

경기 후 선수들이 빠져나가며 취재진과 만나는 믹스트존. 페오파노바는 러시아 방송사 여기자를 껴안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이신바예바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펄쩍펄쩍 뛰었다.

1m 앞에서 본 페오파노바의 얼굴은 주근깨 투성이였고, 키도 1m60cm가 될까말까 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이신바예바도 공식 기록에 나온 키(1m73cm)보다 작아보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여인들이 휘청거리는 장대 하나에 의지해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한 것은 '질투의 힘'이 아니었을까.

아테네=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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