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중.일 정상회담 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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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의 노나카 (野中) 관방장관은 지난 7월 10일 규슈 (九州) 의 미야자키 (宮崎) 시에서 행한 한 연설에서 내년 5~6월에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을 개최하도록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본은 내년의 G-8 오키나와 (沖繩) 정상회담에 앞서 한국과 중국의 관심을 전달할 수 있도록 채비를 차려 사실상의 지역대표로 G-8에 참석한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일견 추정된다.

2천여년의 동북아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의 아이디어에 대한 종래의 비공식 반응은 중국보다 일본이 한동안 더 소극적이었다.

그런 일본이 이번에 3개국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밝힌 것을 보면 단순히 G-8 외교의 맥락에서만 발설한 것 같지는 않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냉전시대에 짓눌려 주눅이 든 일본 외교가 지금쯤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동북아 고유의 지역국가간 협력을 위해 본격적인 시동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교의 기본은 지리에 있고 세계정치와 경제의 기초는 지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지역협력외교의 중요성은 날로 커질 것이다.

세계 경제력의 3대 축에 속하는 유럽연합 (EU) 과 북미자유무역지대 (NAFTA) 는 지역적 결속하에 제도화된 기구이나 동아시아는 친선협회단체에 가까운 동남아국가연합 (아세안) 의 이니셔티브에 따라 겨우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를 발족시키고 한.중.일이 참석하는 아세안 확대정상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그 정체성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다.

동아시아가 지역적 결성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그 지리의 독특한 구성과 문화의 다양성에도 이유가 있지만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돼 특히 동북아에서 갈등과 긴장이 계속됨에 따라 지역국가간 협력의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아직도 북한문제와 동북아의 불안정한 국제정치 역학관계는 동북아 고유의 지역국가들에 의한 포괄적인 협력기구의 창설을 분명히 제약하고 있다.

그러한 제약은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각기 한번씩 전쟁을 치른 미국이 동북아에서 유지하고 있는 평화의 조건이라고도 할 만하다.

또한 한.중.일 3개국간에 상존하고 있는 과거로부터의 부담과 여러 분야에서의 현실적 격차는 쉽게 극복되기 어려운 도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정하에서 한.중.일 3개국은 그 경제력에 상응한 외교력의 행사를 위한 자체의 메커니즘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계속 아세안의 문전을 드나들면서 잔치외교를 참관해 오고 있다.

아태경제협력체 (APEC) , 아세안지역안보회의 (ARF) , 아세안확대각료회의 (PMC) 등이 모두 그렇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15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동북아에는 고유의 지역국가들이 함께 살펴야 할 공통의 의제가 있고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정책의 영역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동아시아 총생산의 90%와 동아시아 세계무역 총액의 75%가 동북아의 몫이고 5천5백억달러의 수입시장을 가진 동북아에서 한.중.일 3개국간의 교역만도 약 3천5백50억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은 지역협력의 충분한 소재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냉전이 종식돼 한.중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민간차원은 물론 정부수준에서도 한.중.일 삼각협력의 서광은 비치고 있다.

지난 1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중.일 환경장관회의는 비록 조용히 넘어갔지만 최초의 3개국 각료회의였다는 점에서 동북아 고유의 지역협력을 위한 서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 (地).문화적 인방 (Geo - cultural neighbours) 인 3개국이 함께 도모해야 할 과제들은 무수하다.

역사교과서의 객관적 기술과 상용한자의 보급을 포함한 교육문화, 관광, 교통, 인프라 건설, 무역투자금융, 범죄의 예방과 진압, 보건위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3개국 각료회의를 상설화할 만하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그 역사적 상징성을 넘어 정례화하게 되면 역내의 모든 문제에 대한 삼각협의의 습관을 기르고 삼각협력의 제도화를 촉발시킬 것이다.

나아가 역내의 민감한 문제도 다루게 돼 평화의 뿌리를 다지는 효과도 내고 동아시아가 지역적 응집력을 점차 발휘해 지역 전체의 통합을 위한 방향과 윤곽을 잡아가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동북아에서 국제정치 안보상의 이해와 지역협력의 이해를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 지도력과 외교솜씨가 요구되고 있다.

(이 글에 실린 필자의 의견은 한국 정부와 무관함)

이장춘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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