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정부 규제개혁 1년6개월 경제현장 점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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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규제개혁 시동을 건 지 1년6개월이 지났다.

과연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걸까 - .중앙일보는 지난 4월 기획시리즈 '규제개혁 아직 멀었다' 를 연재, 정부의 약속과 달리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규제 실태를 파헤친 데 이어 이번엔 기업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현장을 4회에 걸쳐 총점검한다.

대형 건설업체인 D사는 지난해 8백억원 규모의 열병합발전소를 준공하기까지 무려 3백여건의 각종 인허가 서류를 내야 했다.

서류 양만도 무려 라면 상자 50개분. 워낙 복잡한 공사여서 그러려니 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게 아니었다.

예컨대 열병합발전소를 지으면서 사용했던 현장사무소 가 (假) 건물을 짓고 허무는데도 ▶건축허가 신청 14종 ▶착공신고 28종 ▶공사감리 중간보고 8종 ▶임시사용 신청 8종 ▶사용승인 신청 18종 등 모두 84종 서류가 필요했다.

관련 규정에는 이런저런 서류를 안내도 된다고 돼 있지만 막상 내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서류 제출도 일일이 관계 공무원과 사전협의를 거쳐야 했다.

만일 이 과정을 생략하면 반드시 인허가 기관에서 서류보완 지시가 떨어진다는 것. 이러니 발전소 본공사는 오죽했겠는가.

열공급시설.소방설비.고압가스.환경.전력.유해 위험 방지 관련 분야 등에 걸쳐 2백여종의 인허가 서류를 냈다.

이 업체 관계자의 말. "건설.건축 관련 규제가 많이 풀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업계가 느끼는 체감지수는 예전 그대로다. " 운수업체인 H기업은 지난 5월 말 황당한 일을 당했다.

공기업인 포철이 감사원으로부터 독점.수의계약의 폐해를 없애라는 지적을 받고는 엉뚱하게도 하청업체인 H사의 일감을 날렸던 것. 감사원은 지난해 10월 포철에 대한 감사를 하면서 "국가 시설물인 대형화물 유통기지 체제 (CTS) 기지 이용과 관련해 특정 업체 A사와 지난 85년부터 독점 계약함으로써 수요자 (시멘트사) 의 물류비용을 가중시켰다" 고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라고 통보했다.

그랬더니 포철은 지난 5월 A사와 CTS기지 이용계약을 하면서 "하도급 업체를 원칙적으로 배제하라" 고 지시했고, A사는 계약기간이 2002년 말까지로 돼 있는데도 H사와의 하도급 관계를 끊었다.

대표적인 공기업의 규제인 셈이다.

포철측은 "감사원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이라고 해명했지만 감사원측은 "포철이 하도급 문제인 양 호도해 감사원에 보고했는데 이는 감사원의 시정조치에 반하는 것이니 재조치하라" 고 최근 통보했다.

감사원 관계자도 "감사원이 마치 민간 하도급을 규제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어 당혹스럽다" 고 말했다.

기업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여전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를 만들겠다는 정부 약속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철폐된 6천여건의 각종 규제 가운데 80%가 기업활동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필요한 규제는 거의 대부분 풀었다고 자랑한다.

과연 그럴까. 본지 기획취재팀이 현장에서 만난 기업 관계자들의 반응은 전반적으로 회의적이었다.

이들은 일단 행정기관에 제출하는 일부 서류가 줄고 인허가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는 등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불필요한 규제는 수없이 많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불합리한 간섭 ▶공무원들의 자의적 법규 해석 ▶행정편의주의 ▶행정지도 ▶규제만능주의 등은 여전한 상태다.

정부 부처에서부터 개혁은 실종된다.

"일상적 민원업무를 처리하면서 왜 업체로부터 출장비까지 거둘까. " 주유소 운영업체 관계자들은 의문이 많다.

일선 시.군에서 주유기나 액화가스 미터기.가스 미터기 등을 수리하거나 유효기간이 만료돼 점검할 때 거두는 공무원 출장비 (5급 기준 하루 1만5천원)가 이런 경우다.

산업자원부가 고시한 '계량기 점검 등의 수수료 및 비용에 관한 규정' 에 따른 것이라고 지자체는 항변하지만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기획취재팀 = 박의준.하지윤. 왕희수.양선희.박장희. 나현철.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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