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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수재민 외면한 표잔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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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기도 북부와 수도권이 통째로 물에 잠기다시피한 2일 오전 여야 수뇌부는 고양시로 몰려갔다.

오는 19일 있을 고양시장 보궐선거 필승결의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국민회의 이만섭 (李萬燮) 총재권한대행과 한화갑 (韓和甲) 사무총장 등은 오전 10시30분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행사장인 고양시 민방위교육장에 들어섰다.

지붕에선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뒤엔 김옥두 (金玉斗) 총재비서실장도 나타났다.

李대행과 韓총장은 "고양시 발전을 위해선 중앙정부나 청와대와 긴밀히 협조할 수 있는 여당 후보를 당선시켜 달라" 고 목청을 돋웠다.

같은 시각 고양시청내 고양문화회관. 꽹과리와 연호가 뒤섞여 잔칫집 같은 분위기 속에 입장한 한나라당 이회창 (李會昌) 총재는 최근 내각제 개헌 유보와 여권인사 뇌물사건을 거론하며 여권을 맹비난했다.

이어 정부의 수재 대비책 미흡을 탓하면서 "민심뿐 아니라 천심 (天心) 도 이 정권을 떠났다" 고 주장했다.

李총재 주변엔 당직자 등 한나라당 의원 20여명이 따랐다.

여야는 이날 물난리 속의 정치행사를 바라보는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던지 여러 차례 "송구스럽다" 고 했다.

국민회의는 즉석에서 수재의연금 모금함 2개를 설치했고, 한나라당은 대회 명칭을 수해대책을 위한 결의대회로 바꾸는 '민완성' 을 보였다.

정치권이 선거에서 이기려고 표밭으로 달려가던 그 시각, 이재민 1만3천여명은 폭우에 잠긴 집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난해 물난리에 몸서리쳤던 서울 중랑천 주변 주민을 비롯, 곳곳의 이재민들은 장대비 아래 긴급히 대피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 5분 발언에서도 검찰의 세풍 (稅風) 수사 공방이 수해대책 논의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정치권이 아직도 성난 민심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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