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살아있다](7) 김진현씨의 시장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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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세계 백화점의 김진현 (金鎭賢.52) 사장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장을 찾는다. 그가 인사동과 황학동 시장을 자주 들르는 단골 고객임은 백화점 업계에선 널리 알려진 사실. 金사장은 시장에서 상품과 마케팅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다.

"시장이 재미 있잖습니까. " 지난 9일 金사장이 인사동과 황학동의 '재미 있는 시장탐방' 에 나서는 것을 함께 동행해 봤다.[편집자]

金사장이 이날 오전.오후에 각각 들른 인사동과 황학동 시장의 가게 주인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인사말을 했다.

"어서 오세요. 이 땡볕에 구경 나오셨어요?" 이곳 상인들은 물건을 사라고 직접 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가게를 그냥 구경시켜 줄 뿐이다. 상인들은 손님이 들어와 구경하면서 재미로 한 두 가지를 사면 그걸로 만족한다. 다른 시장과 다른 민화 (民畵) 같은 한가로운 풍경이다.

"인사동과 황학동은 시장 자체가 무형 (無形) 의 상품입니다." 그가 이곳의 8백50개 점포 가운데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골드화이어 갤러리' .광개토대왕비를 33:1로 축소한 모형 (3만5천원)에 손길이 닿았다.

"인사동이 문화재.고미술 등을 응용해 상품화하는 모티브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나이키.필라 상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金사장은 바이어 시절 인사동에서 힌트를 얻어 청자파편을 상품화한 이색 반지와 목걸이 판매행사를 기획했던 것을 화제로 삼았다.

그는 '보원요' 점포에 들러서는 아이 크기만한 도자기를 보고 감탄했다.

"저렇게 큰 도자기가 잘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1백 개를 구우면 한 두 개만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요업공학과를 전공해 이 분야에도 해박하다. 그가 이곳에 올 때 마다 들르는 '동양다예' 집도 잊지 않고 찾았다. 다양한 다기가 그의 마음을 사로 잡기 때문이다.

'동서고미술' 집에 들러서는 제기 접시를 만지작거리면서 가격을 물었다.

1백년 전 물건이 5만원. 그는 받침대가 원형이 아닌 5각형의 '각제기' 를 보고 "재미있다" 는 표현을 또 썼다. 새로운 시도가 흥미를 끈다는 얘기다.

金사장은 마지막으로 '원봉필방' 에 들렀다. 인사동이 4백년 전 한지를 만들던 곳임을 얘기해 준다. 이곳에서 한지로 만든 누런 낙서장 (3천원) 을 하나 골랐다.

"인사동에 올 때마다 대학교 2학년생인 딸 (유나)에게 주려고 이런 물건들을 한 두 개씩 사 갑니다."

그가 인사동을 나와 황학동으로 간 것은 오후 4시쯤. "인사동이 서울 대감 집이라면 황학동은 시골 여염집 같아 매력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잡동사니들 가운데 재봉틀 다리만 파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식용으로 재봉틀 다리를 놓고 그 위에 유리를 깔면 장식품으로 상품가치가 크다는 설명이다.

그의 눈에 이제 시골 농가의 소쿠리.주판 (각 1만원) 이나 낡은 색소폰 (18만원) , 일제 때 가방.축음기 (각 15만원) 등은 이색적이지 못하다.

무당집 물건들을 옮겨다 놓은 듯한 소품이 널려 있는 집이 그의 단골장소.

그는 낡은 가전품을 수리해서 파는 수많은 점포들을 애써 외면하고 다닌다. 이들 상품은 창조성과 재미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날 골목길을 우연히 더 들어가 찾아 낸 이색 점포는 중고 골프채를 파는 곳. 골프채를 인테리어 소품용으로 판다.

아이언 한 개에 1만원, 드라이버는 2만원이면 살 수 있다. 이 골목에는 미국.인도.멕시코 등에서 수집한 자잘한 소품들도 널려 있다.

金사장은 이곳에서 40년째 시계를 파는 노점상인 이인영 (73) 씨와 시장의 애환을 소재로 잠시 대화를 했다.

황학동이 재개발되면 앞날이 어떨지, 일제시대 때 서서 먹는 술집이 늘어 섰던 이곳은 또 어떻게 바뀔지를 얘기하며 저녁 노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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