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 신문고] 여권사진 자로 잰뒤 재촬영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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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떤 이유로든 해외여행이 고통이 돼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새 여권을 받았을 때 뿌듯한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언필칭 글로벌 시대, 비록 삶에 주름이 겹겹이 진 서민이라도 여권을 보면서 자유로운 비상 (飛翔) 을 꿈꿔볼 수 있으므로.

그러나 사진작가 김현 (56.가명.서울 용산구 원효3가) 씨는 사정이 다르다. 최근 발급받은 여권을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볼썽 사나운 사진 때문이다.

코가 주먹만하게 나오고 얼굴형도 둥글넓적하게 변형돼 아이들이 쓰는 말 그대로 '대두 (大頭)' 다. 내 얼굴이란 생각이 통 안든다.

명색이 사진작가 아닌가. 혹시라도 남이 볼까 두렵다. 이런 불량 사진이 여권에 붙게 된 사연을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金씨가 여권 기간연장을 위해 영등포구청을 찾은 것은 지난 3월초. 구청에서는 위조하기 어렵게 만든 새 여권으로 바꿔야 한다며 사진 2장을 내라고 했다.

사진을 받은 창구 담당자는 대뜸 얼굴부분에 자를 갖다 대더니 이 사진으론 안된다며 다시 찍어오라고 했다.

"여권 사진으로 찍었는데 안된다니요?" "사진크기는 맞지만 얼굴부분이 2.5㎝가 안돼 쓸 수 없어요. " 직원의 말은 단호했다.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함께 줄을 섰던 사람들 중 상당수도 같은 이유로 퇴짜를 맞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구청앞 사진관에서 '규격에 맞는' 사진을 다시 찍었다. 사진관에서 金씨의 기분은 더 구겨졌다. 우선 요금이 두 배였다. 먼저 사진은 4천원 주고 찍었는데 여기서는 8천원을 받았다.

게다가 사진관 직원은 규격에 맞춘다고 카메라를 얼굴에 바짝 갖다 댔다. 38년 동안 사진을 찍어온 金씨는 "일반 렌즈 카메라를 그렇게 대고 찍으면 피사체의 형태에 굴절이 생긴다" 고 말렸다. 하지만 그 직원은 "여권사진은 내가 잘 안다" 며 막무가내였다. 金씨는 결국 새 사진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여권사진의 규격은 여권법시행령 5조1항4호에 규정돼 있다. 사진크기는 가로 3.5㎝.세로 4.5㎝에 얼굴크기는 2.5~3.5㎝다. 영등포구청 여권계 담당자는 "새로운 여권이 나오면서 얼굴크기를 정확히 따지고 있다" 고 말했다.

金씨는 그동안 일 때문에 1백여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외국 친구들의 여권사진을 봤다. 규격은 각양각색이지만 사진에 나온 얼굴은 모두 피사체 형태를 충실히 담고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 나라의 새 여권은 '일그러진 얼굴' 을 유도하는지 金씨는 알 수 없다. 참고로 미국 대사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규정상 가로.세로 각 5㎝ 크기, 흰색 배경에 양쪽 귀가 보이는 얼굴 전체의 정면 사진을 요구한다는 규정이 있긴 하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 는 원칙만 지켜지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조 여권이 나도는 것을 막기 위해 얼굴사진을 정확히 찍도록 요구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규격을 따지고, 인근 사진관에서 턱없는 가격을 받으면서 사진을 엉터리로 찍는 것은 문제라는 게 金씨의 지적이다.

무슨 뒷 사정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생기더라고 한다. 차라리 여권과에 즉석 카메라를 설치, 원가로 서비스하는 게 어떨까 하는 게 金씨의 바람이다.

기획취재팀 = 왕희수.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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