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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의 석유 무기화, 현실성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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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비중동 산유국의 중요성이 커진다 해도 앞으로 상당 기간 세계의 에너지 공급원 역할은 중동이 맡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와 달리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생산 쿼터를 조절하는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OPEC 회원국들과 중동 정치에 대한 세계의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원유를 팔아 벌어들인 자금과 군사적 야심의 결합은 특별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과 1990년대 이라크가 밀어붙인 가공할 만한 군비 증강이 이런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중동 국가들은 원유 생산량 조절을 위협 수단으로 삼아 에너지 안보 논쟁을 주도해왔다. 이라크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과 국내 분쟁은 단기 원유 공급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시설 유지와 투자 유치에 부정 요인으로 작용해 장기적으로 산유국의 생산 능력을 깎아먹는다.

하지만 중동의 원유 공급에 대한 잠재적 위협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모든 가능성과 예측을 뒤엎고 중동의 정권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도전 속에서 살아남았다. 테러의 위협 아래 원유 산업이 무릎을 꿇을 것이란 우려는 비현실적이다. 그런 공격의 효과는 지극히 단기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이어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결 시나리오는 신빙성 없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 역량을 보유했는지 여부도 의심스럽고, 만약 그렇게 시도한다면 즉각 전 세계 연합군의 반격에 직면할 것이다. 특히 해협 봉쇄는 정유 시설이 태부족한 이란의 내수용 에너지 공급을 팍팍하게 만드는 등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꼴이 된다.

원유 무기화의 신화적인 파워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점차 무력한 수단으로 판명되고 있다. 73년 아랍의 원유 수출 금지 파동은 거대한 실패로 끝났다. 원유를 무기화해 석유파동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을 67년의 국경선까지 철수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산유국들은 원유 판매 수입 감소로 인한 충격을 흡수할 능력이 없었다.

산유국들은 왜 원유 시장에 대한 지배력에 그렇게 집착할까. 교토의정서에 대한 OPEC의 거부감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교토의정서가 발효되면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의 20%가 줄어드는 등 타격이 크다. 또 미국이 유럽의 예를 좇아 에너지세를 높여 석유 의존도를 줄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미국의 석유 소비를 실질적으로 줄이고 청정 에너지원을 개발하겠다는 오바마의 구상은 정말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석유 소비를 줄이는 일련의 정책들은 경제회복이라는 현재의 최우선 정책 목표와 배치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동의 안정을 유지하는 정책은 지금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 이란의 핵도전과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안정화 문제가 최우선 과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17%씩 석유 소비를 줄여간다 해도 여전히 걸프 지역에 대한 원유 의존도는 변함없다.

슐로모 벤아미 전 이스라엘 외무장관
정리=정용환 기자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