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후보작 지상중계] 1. 시 - 김기택 '무단횡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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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와 계간 '문예중앙'이 공동 주최하고 LG그룹이 후원하는 제4회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의 최종심에 오른 후보작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미당문학상 후보작들 중에서 직접 고른 시 한편,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소설 한편씩을 묶어 소개하는 기사를 모두 열차례에 걸쳐 게재합니다. 올해에는 시인.소설가의 작품 설명, 2심 심사에 참여했던 평론가들의 작품 해설을 고스란히 정리해 시 한편, 단편소설 한편에 대한 실질적인 감상 길잡이가 되도록 했습니다.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소개합니다.

시 - 김기택 '무단횡단'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발표>

◇ 약력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89년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
-95년 김수영문학상, 2001년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후보작 '무단횡단' 외 18편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고 서정주 시인을 기리는 미당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시인 김기택씨는 전문을 소개할 짧은 시 한편을 정해달라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단 횡단'을 골라 주었다. 그마저 길다면 '얼룩'이 좋겠다고 밝혔다.

"길이와 상관 없다면"이란 단서를 붙이자 '그루터기''직선과 원''수화(手話)''기이한 은총''물 위에서 자다 깨어보니'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시편들이 빼어나기보다 고만고만해서 고르기가 그렇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씨는 "'무단 횡단'은 산문시이고 독자 누구라도 읽어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하마터면 추돌사고가 날뻔한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할머니는 아직 서울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시골 출신이다. 김씨는 "삶의 연륜이라는 것은 결국 죽음의 연륜이랄까, 수없이 많은 죽음이 지나가는 상황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무단 횡단과 그에 따른 요동, 그 짧은 순간이 삶은 순간 순간이 다 위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씨는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태로울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교통사고는 물론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지나쳤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과 대비된다"고 말했다.

'기이한 은총'에서 시의 화자는 고속 엔진.바퀴 소리.경적 소리.급정거.비명 등 도시 생활의 이런 저런 소음 속에서 음악 소리를 듣고는 기이한 은총으로 여긴다. 김씨는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의 감각은 환경에 적응해 무뎌지게 마련인데 나중에는 일상적인 소음조차 음악으로 들을 정도로 몸이 상황에 맞춰 변해간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몸의 깨달음이랄까, 그런 변화와 적응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무단 횡단'의 상황은 운전하는 누구라도 경험해 봤을 만한 것이다. 우리 내부의 폭력성.허위.기만같은 것들이 드러나는 순간인데, 공감의 폭이 큰 시"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김기택 시의 특징으로 형용사.부사 사용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꼭 필요한 말들만 짧게 하는 언어 구사, 일상적 소재 등을 꼽았다. "때문에 일상의 세부가 건조하게 처리되고, 미학적이고 자연적인 서정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느낌도 받게 되는 한편 대상은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진다"고 평가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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