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베이징회담과 서해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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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1일 베이징 (北京)에서 열리는 남북 차관급회담은 모처럼 찾아온 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로서 기대가 크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나 임동원 (林東源) 통일부 장관도 이 회담이 장관급 및 총리급 회담으로 진전될 것이라고 내다봤으며, 북측과도 이 문제에 대해 잠정적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남북관계에서는 어떤 종류와 형식의 회담이든 남북 당국자들이 얼굴을 맞대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좋은 징조로 환영할 만하다.

이번 회담이 성과를 거두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년2개월만의 당국자회담 성사 자체만으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회담의 중심 의제는 역시 이산가족 문제다.

지난해 4월 비료와 이산가족 문제를 '상호주의' 원칙아래서 맞바꾸려 했던 우리 정부의 시도는 북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이번에는 우리가 회담 개최 전까지 10만t의 비료를 먼저 주고 회담을 개최해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상봉의 규모와 빈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을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일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이미 상당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이들의 주 연령층이 노령화되고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성사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또 단순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분단의 직접적인 희생자들인 이들의 아픔을 다소나마 덜어준다면 냉전구조 해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북측은 이 문제를 논의하더라도 체제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는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측에 상당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 예상된다.

따라서 정부도 판문점이나 평양을 상봉 장소로 희망하고 있지만 금강산 등 다른 지역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일단 이번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있어 작은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마도 이번 회담이 잘 진전돼 고향방문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떠나온 고향땅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85년 고향방문단 때처럼 평양에서 가족들이 만나는 정도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가족생사 및 소재 확인, 서신교환, 상봉 등 시범사업을 규모와 상관없이 추진하고, 정기적으로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는 상봉장소를 공식화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이 정도의 성과라도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이렇듯 모처럼 맞이한 남북관계 진전의 호기 (好機) 를 앞두고 북한은 서해안의 꽃게잡이 어선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북방한계선을 넘어 며칠째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북측의 의도에 대해 추측이 무성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우리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조치를 단호하게 취해야 한다.

특히 정부의 대북정책 3원칙에서 밝힌 바대로 무력도발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다각적인 통로를 통해 우리가 이번 사태를 무력도발로 인식하고 있음을 인지시켜야 한다.

더욱이 회담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북의 군사적 시위를 용인한다면 협상에서도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보다 확고한 안보태세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역사적인 금강산 관광사업이 성사된 것도 잠수정.간첩선 침투 등 북측의 도발적 행동이 있었음에도 정부가 인내심 있게 일관성을 갖고 정경분리 원칙아래 포용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취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다 연계시키면 일관된 정책은 가능하지 않다.

무력도발 불용 (不容) 의 원칙을 분명하게 견지하되, 작금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은 협상대로 추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베이징회담에서 북한은 당장에 시급한 비료 등 경제적인 지원을 얻고자 하는 특정한 목적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이를 활용해 차제에 다양한 대화 통로를 만들고, 나아가 고위급회담이나 정상회담으로 진전시키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대가의 크기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남북대화가 활성화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특히 당국자간 대화가 자주 열리는 것은 어찌됐든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89~92년의 예를 봐서 알 수 있듯이 남북대화 자체만으로 긴장을 근본적으로 해소하지는 못한다.

이번 회담에서 정부는 성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남북대화의 첫 단추를 끼우는 심정으로 임했으면 한다.

박재규 경남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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