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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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9장 갯벌

"허 참. 듣다보이 밸 소리를 다 듣겠네…. 좌상인 형님이 그런 억지 소리를 해서 되겠어요? 내가 고깃국을 훌훌 퍼먹다보이 집에 두고 온 마누라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는 말이었지. 백두산 기슭 밑에 와 놓고 보니 마누라 생각난다캤씁니껴?"

"동서 말마따나 나로 말하면, 남보기엔 뱃사람이었지만, 실은 도박판에서 잔뼈가 굵어 온 처지가 아닌가. 그게 무슨 얘긴지 알어?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안목에는 누구보다 이골이 났다는 얘기여. 그런 내가 동서가 가진 속셈 하나를 꿰뚫어보지 못할까?"

"개고기 먹었다고 숟가락 놓자마자 무대뽀로 (사정두지 않고) 짖어 대며 덤부는 (덤비다) 게 아이시더. 체통을 차려야지 그래서 되겠어요?" "동서 말 본새를 보자면, 내가 시방 죽은 개고기 먹고 산 개처럼 짖어대고 있다는 얘긴데? 우리가 막가는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말 함부로 내뱉어도 되겠어? 그것도 진정한 백두산을 코 앞에 두고 말이야. "

"코 앞은 무슨 코 앞이라요. 택시로 달려도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는 게 백두산이라카던데요. 내가 한 말이 개소리로 들렸다면 죄송하이더. 다시는 그런 말 안함시더. "

"우리가 어쩌다보니 동서지간이 되었지만, 나도 알고 보면, 뼈대있는 집안의 소생이여. 인생유전이란 말이 공연한 흰소리가 아니구만. 동서가 태자리조차 어딘지 모르는 바람 같은 사람이란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무간한 혈육 사이라 할지라도 할 말이 있고 삼가야 할 말이 있는겨. 내가 다소 억지를 부렸기로서니 개소리 한다고 몰아붙이기만 할겨?"

"미안합니더. 그런 쌍소리는 안해야 되는데. 어쩌다보이 불쑥 튀 나왔뿌렀어요. 내가 배운 게 있어야지요. 따지고 보면, 형님하고는 길벗하고 다닐 처지도 못되는데…. "

"내가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니지만, 배에서 조여사를 구슬려 놓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연길에 떨어졌어도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밖에 될 게 없었지 않았나. 그런 나를 이렇게 홀대하고 대들면 동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나. "

"말 한 마디 잘못한 걸 가지고 무슨 홀대까지 동원하고 그러십니껴. 백두산이 그렇게 몸살나게 보고 싶으면,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동안 형님 혼자서 퍼뜩 갔다 오소. "

"환장하게 보고 싶지는 않어. " 식당을 나선 그들은 우선 옌지 시내의 신싱제 (新興街)에 있다는 시스창 (西市長) 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시스창은 옌지에서 가장 큰 상설시장이면서 중국의 동북부인 지린성 중에서도 크기로 손꼽히는 장시였기 때문에 백두산보다는 먼저 가 보고 싶은 장소였었다.

조여사도 옌지에 도착하면 먼저 가 보라는 권유를 잊지 않았었다. 세 시간에 걸쳐 구경했었던 시스창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국에서 수입해 간 상품과 북한에서 흘러든 상품들이 스스럼없이 서로 어울려 좌판에서 팔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수입해 간 상품들은 의류와 화장품이 많았던 반면, 북한에서 흘러 든 상품이라면 원산의 명태와 조잡하게 제작된 주방도구들이었다.

그들이 눈여겨본 것은, 옌지에서도 북한의 변경지방을 넘나들며 그곳 주변들을 상대로 하는 보따리 무역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나 북한지방에 가져다 팔고 있는 의류들은 옌지에서 따로 제작되고 있다는 것도 알아 냈다.

시스창의 좌판에서는 세 사람이 어린날에 보았던 먹을거리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날로 되돌아 간 매혹적인 회포에 젖었던 세 사람은 이것저것 맛보라고 집어 주는 먹을거리들을 맛보며 시장 안을 해가 지도록 휘젓고 다녔다.

조여사가 적어 건네 주었던 연락처에 전화를 걸어 본 것은 오후 다섯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걸면 반드시 제 자리에 있다고 장담했었던 조여사의 말대로 대뜸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상대가 나타난 셈이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는 듣기에 탱글탱글한 이십대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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