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깎을 뼈도 안남은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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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순용 (朴舜用) 검찰호 (號)가 출범 10여일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공황상태' '초비상 사태' 라고 표현할 정도다.

검찰이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국민적 불신을 받고 총장 동기생 사표거부에 이은 파업 공작설 등 자중지란 (自中之亂) 과 내우외환 (內憂外患) 까지 겹친 적은 일찍이 없었다는 뜻일 게다.

사실 검찰의 이같은 사태는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다.

검사들이 연판장을 돌려 집단으로 검찰총장 퇴진을 요구했던 초유의 검란 (檢亂) 파동이 첫 고비였다.

그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환부를 매몰차게 도려냈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개인이나 검찰조직 모두 상처를 덜 받았을 것이고 정부도 훨씬 부담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법무부장관 부인이 관련된 옷 로비 사건을 검찰이 수사토록 한 것도 자충수였다.

오직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승진.영전하는 풍토에서는 이른바 명검사일수록 수사를 제대로 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수사결과를 불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검찰에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조직의 관리자로서 외길을 고집한 것은 무모하기까지 했다.

현직 공안부장이던 진형구 (秦炯九) 전 검사장의 돌출행동도 이같은 검찰의 분위기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설내용이지만 조직 전체가 뒤숭숭하다 보니 악재 (惡材)가 겹치는 게 아닌가.

이제 검찰은 더 추락하려야 추락할 곳이 없다.

검찰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나 존경도 물건너갔다고 봐야 하고 이같은 민심은 검찰 스스로 누구보다 정확히 읽고 있을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뒤집어보면 퇴임한 김태정 (金泰政) 전 법무부장관의 불행은 곧 신임 朴검찰총장의 행운일 수 있다.

金장관이 진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모든 허물을 송두리째 떠안고 갔기 때문에 朴총장은 백지 위에 자신의 구상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의미다.

워낙 바닥에서 출발하는 셈이므로 조금만 잘하면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주위 환경을 살펴보면 검찰의 회생 (回生) 이 말처럼 쉬울 것 같지 않다.

우선 검증되지 않은 인력구조다.

검사장급 이상 39명 중 신임 검찰총장보다 사시 (司試) 선배거나 동기인 상위 13명이 한꺼번에 물러난 공백이 너무 크다.

법원쪽과의 연륜차이도 문제다.

어려운 때일수록 경험과 경륜이 풍부한 노장층이 두터워야 하고 검찰로서는 조직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검찰총장 동기생 7명을 모두 퇴임시킨 것은 잘못된 인사요, 국가적 손실이다.

50대 초.중반의 나이라면 30년 가까이 축적한 경험을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한창 펼쳐야 할 때가 아닌가.

과거 고시 (高試) 8회의 정치근 (鄭致根) 부산지검장이 갑자기 검찰총장에 발탁됐지만 배명인 (裵命仁).김석휘 (金錫輝).김성기 (金聖基).서동권 (徐東權) 씨 등 동기생들은 계속 현직에 남아 그뒤 장관과 검찰총장을 번갈아가며 한 적도 있다.

정년 가까이까지 두세명이 남아 경합하는 일본의 검사총장 경우와 우리나라를 동일시해 '용퇴 (勇退)' 운운하며 강제로 몰아내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또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에서 지나친 발탁인사는 자칫 말 잘듣는 '권력 해바라기형 (型)' 검사를 양산할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금명간 있을 차장검사급 이하 후속인사에서는 보다 객관적이고 원칙있는 인사기준이 제시돼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신승남 (愼承男) 대검 차장검사가 벌써 차기 총장 후보로 가시화되고 있는 부분도 주목거리다.

벌써 차기 총장 후보가 거론된다는 것은 예측 가능성의 수준을 넘었다고 봐야 한다.

후계자가 부각되면 힘이 그곳으로 쏠리는 것이 조직의 생리다.

YS정부 초기 TK출신인 박종철 (朴鍾喆) 검찰총장이 임명됐지만 PK출신 김도언 (金道彦) 대검차장쪽으로 힘이 쏠리는 바람에 결국 朴총장은 6개월만에 도중하차했었던 과거를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결국 검찰의 회생여부는 검사 자신들의 손에 달린 셈이다.

검찰에는 이제 더 이상 깎을 뼈도 없고 거듭 태어날 기회도 남아 있지 않다.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고관집 도둑사건이나 3.30 재.보선 부정, 옷 로비 사건 등 지난날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의혹으로 남겨뒀던 사안들을 하나라도 제대로 처리해 보라. 검찰의 정치적 중립 의지가 확인되는 순간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빛부터 달라질 것이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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