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있으매 '적이 동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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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권투선수 나자 알리(24)는 심판이 자신의 손을 들어올리자 헤드기어를 벗고 빙그레 웃으며 미국인 코치 모리스 와킨스(48)를 쳐다봤다. 그는 펄쩍펄쩍 뛰어 와킨스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올림픽에 출전한 이라크 유일의 권투선수인 알리. 그는 19일(한국시간) 48㎏ 라이트 플라이급 1회전에서 북한의 곽혁주에게 21-7로 판정승을 거뒀다. 승리의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와킨스와 함께했던 1년2개월여가 주마등처럼 흘렀다. 올림픽 무대에 서기까지 두 사람은 너무나 높은 벽을 넘었고, 이제 첫 승리를 따냈다.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알리는 지난해 5월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70여㎞ 떨어진 힐다의 한 권투장에서 와킨스를 처음 만났다. 아버지가 이라크 챔피언 출신 복서여서 그는 어릴 때부터 샌드백을 안고 자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이라크의 올림픽 일부 종목 출전을 결정하자 알리는 복서의 길로 들어섰다.

과거 미국 주니어 웰터급 대표였던 와킨스는 지난해 초 부친이 운영하는 방역회사 직원으로 재건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이라크에 입국했다. 와킨스의 복서 경력을 알게 된 현지 주둔 미군 측이 두 사람을 연결했다. 구멍난 링 바닥에 찢긴 글러브…. 마우스 피스 한개도 없는 것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라크에서 어쩌면 당연했다.

와킨스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이라크 복서들에게 코치인 자신이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점을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살해 위협도 날아들었고, 곳곳에서 폭탄도 터졌다. "당장에라도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라크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선 복서를 길러야 했고, 그 열정이 저를 붙들었습니다." 와킨스는 우선 구타부터 없앴다. 당시 이라크 스포츠계에서 코치가 선수를 때리는 일은 일상사였다. 그는 또 선수들에게 "이라크인은 할 수 있다"를 외치게 했다.

그러나 알리 등 이라크 복서들은 올림픽 최종 티켓을 따는 데 실패했다. 절망했지만 IOC가 알리에게만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를 주기로 했다. 와킨스는 지난 7월 한달간 알리를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미국 대표팀과 공동 훈련을 하게 했다. "메달을 따 당신에게 걸어주고 싶습니다." 알리는 와킨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해와 평화. 올림픽 정신이다. 알리와 와킨스의 인연이 이 모든 것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목표는 폭압정치와 전쟁에 지친 이라크인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이다.

아테네=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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