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2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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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동쪽으로는 여수와 여천군을 두고, 서쪽으로는 득량만을 사이하면서 보성과 장흥, 완도를 이웃하고 있는 고흥은 삼면이 바다에 잇닿아 있는 까닭에 예로부터 생선과 갯것이 지천이던 고장이었다.

고흥반도 동쪽인 여자만과 서쪽인 득량만의 바다와 갯벌에서는 피조개, 새조개, 고막과 바지락이 흔천이었다. 옛말에는 벌교의 고막이고 고흥의 석화라 했다지만, 석화 아닌 고흥 갯벌의 고막도 알아주는 특산품이었다. 그 석화가 많아 진석화젓으로 명성을 날렸던 곳이 바로 여자만 아래쪽인 해창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득량만 안쪽의 고흥만과 함께 해창만도 간척지로 변하고 말았지만, 지금도 수하식 알굴로 진석화젓을 담그고 있어 옛 명성이 깡그리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만 안쪽에 있는 장도와 백일도에선 고막, 동일면으로 부르는 남쪽 내나로도에선 바지락, 대전과 수락도에선 새우, 득량도와 소록도 사이에선 키조개, 남양면 고역 갯벌에선 굴, 과역면 풍양과 녹동의 오마간척지에선 김과 미역이 대대적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이튿날은 공교롭게도 새벽녘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긋기 시작하면, 어젯밤부터 벼르고 있었던 고흥읍내 남계리 5일장 구경은 단념하는 게 옳았다.

궂은 날씨 때문에 심사도 덩달아 울적해서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 두자는 심산으로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곧장 제각기 자던 방으로 흩어지려는데, 채비를 갖춘 방극섭은 어니새 마당으로 나서고 있었다.

고흥반도 끝머리에 있는 녹동포구까지 구경시키겠다는 방국섭의 성화를 뿌리칠 재간이 없었던 일행은 결국 그를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철부지들은 어른들끼리의 소풍인 줄은 모르고 따라가겠다고 응석에 앙탈을 부렸기 때문에 두 아내들이 진땀을 빼고 있었다.

숭어뜀을 하는 아이들을 소곤소곤 달래고 있는 아내들의 태도는 유별났다.

장터에서 보았을 때처럼 야무지고 억척같았던 태도는 전혀 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역을 치르듯 아이들을 따돌리고 녹동포구에 당도하고 나서야 코 앞에 시야를 가로막고 누워 있는 섬이 소록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녹동은 근처에서 잡히는 생선들의 집하장 구실을 하는 포구였고, 소록도 뒤쪽에 있는 거금도에 갯바위 낚시터가 널려 있었기에 외지 낚시꾼들의 발걸음이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시내의 장터 입구를 가리키는 5일장 표지판이 걸린 포구이기도 하였다. 장날은 아니었지만, 흔하지 않은 5일장터 표지판을 발견하게 되면서 승희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데도 포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포구의 방파제를 따라 어물난전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과연 키만한 크기의 키조개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나마 고흥반도의 갯벌은 아직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방극섭은 고흥 토박이답게 포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 건네기 바빴으나, 일행을 접대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어물난전 아낙네와 회거리를 흥정하고 있었다.

"찌그 뭐시냐. 이거 득량만에서 잡은 거 맞지라?" "조금씩 갖다 판게 거짓말은 안하제. 두 마리 장만해 드릴 텐게 삼만원만 줘불시오. " "쬐까난 거 두 마리 담아놓고 삼만원이당가?" "워메 어쩌까이. 아는 안면에 싸게 주는 거 몰러서 불퉁가지 부리고 그라요?" 한산한 횟집 2층방을 통째로 차지하고 앉았다. 방극섭의 말마따나 형식은 어디로 내빼뿔고 보이지 않았다.

방극섭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온 것은 푸집한 횟거리 안주에 소주 두 병째의 뚜껑을 딸 때였다. 그는 한동안 그윽한 시선으로 철규와 승희의 안색을 살피다가 뇌까렸다.

"나가 한씨 속도 모르고 이런 말해서 실례 안될랑가 모르것네…. 어쩌꺼나 나딴에는 벼르고 있었던 말이니 해부러야 속이 시원하제. 나는 두 사람이 내와간인 줄 알었는디, 어젯밤에 서로 각방자리 하는 걸 보고 쬐까 놀라버렸당게, 두 사람이 내외간이 아니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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