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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이야기가 있는 식탁] 선재스님과 사찰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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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음식 전문점인 채근담에서 선재스님을 만났다. 스님에게서 사찰음식을 전수받은 주인은 병환으로 몇 해 전 타계하고

지금은 젊은 아들 내외가 이곳의 음식맛을 내는데 스님에게서 따로 음식을 배울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다.

식당에 딸린 작은 정원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스님은 정원에 만개한 꽃과 무성하게 자란 풀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미 우리네 식탁은 제철 아닌 식품들이 일색을 이루고 있지만 이렇게 작은 정원에는 제철 제 햇빛을 따라 자란 율무가 열매를 맺고 칡덩굴이 덩거칠다.

제철음식을 먹는 것은 불교의 식생활 가운데 기본이다. '금광명최승왕경'에는 봄에는 가래 심화병이 나니 떫고 뜨겁고 매운 것을, 여름에는 풍병이 도지니 미끈미끈하고 뜨겁고 짜고 신 것을, 가을에는 황열병이 생기니 차고 달고 미끈미끈한 것을, 겨울이면 세 가지 병이 한꺼번에 나니 시고 떫고 미끈미끈하고 단 것을 먹으라는 대목이 있다.

"겨울의 노독이 풀리는 봄에는 새싹과 같은 쓴맛 요리를, 여름엔 밀가루나 보리처럼 미끈미끈하고 오이와 같은 열매나 잎 넓은 식물을 먹어야죠. 가을에는 단맛의 과일이 좋고요. 봄에 씀바귀 나물을 세번, 여름에는 상추 대궁을 올리지 않는 상좌는 내쳐도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죠."

사찰음식에서는 오신채를 쓰지 않는다. 마늘.파.부추.달래.흥거(무릇)는 정적이어야 하는 선행에 반해 밖으로 내치닫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생선을 비롯한 육류나 술, 조미료, 인스턴트 음식 등도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사찰음식이라는 표현 대신 선식(禪食)이라는 말이 제격이다.

춥고 메마른 겨울철에는 야채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나물을 말리고 장아찌를 담그는 등의 여러 가지 저장법이 발달한 것도 사찰음식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이 출가한 첫해 겨울이었다. 땅이 꽁꽁 얼어붙어 무를 뽑을 때면 손가락도 곱아들었다. 뽑은 무를 지게로 져 나르는데 어머니가 찾아왔다. "가서 보면 울 테고 울면 스님의 어머니 자격이 없으니 가지 마라"며 아버지는 한사코 말렸다 한다. 울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쓰고 왔지만 승복에 삭발, 고무신 차림에 지게질을 하고 있는 딸 모습에 어머니가 정신을 놓았다. 안쓰럽게 보신 큰스님이 언 무를 잘라 채반에 널어 말린 뒤 갖은 양념에 재워 구워주었다. 언 무 구이를 할 때면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16년 동안 딸에게 삼배를 잊지 않았고 존댓말을 썼다. 스님의 손에서 사시사철 수백 가지의 음식이 만들어지는데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첫마디는 어머니다. "어머니의 동치미 맛을 내는데 10년이 걸렸어요." 어머니는 딸을 보러 올 때마다 묵과 목탁을 들고 왔다. 어머니는 도토리 묵 하나도 설렁설렁 무치지 않았다.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거랑맞다"해서 식초와 간장, 깨소금만으로 맛을 냈다. 청포묵을 썰 때면 아무리 가늘게 채썰어도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호박편수도 맛있는데, 여름이면 어머니가 호박을 따서…."

스님의 손맛은 어머니와 수랏간 궁녀였던 외조모의 손맛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싶다. 집안 내력도 내력이려니와 말빚이 스님을 음식으로 정진하게 했다. 친구들과 들른 사찰에서 먹은 음식이 짜고 맛이 없었다. 포교당의 한 스님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기까지 했다. 식품영양을 전공해 스님들을 공양하자고 친구들과 약속했는데 그 말빚을 갚는 모양이란다.

"불교에서 음식은 음식이기 이전에 약이에요. 과식은 만병의 근원이고요." 발우는 스님의 밥그릇이란 뜻 외에 적당한 양을 담는 그릇이라는 뜻이 있다. 적당히 담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비운 후 물로 헹궈 그 물까지 마심으로써 환경 오염의 피해까지 줄인다. 발우공양은 버리는 것이 지천인 요즘 사람들이 실천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우엉들깨탕과 우엉잡채. 음식이 상 가득한데 스님의 손이 국수로 먼저 간다. 국수는 '승소', 스님의 미소라고 불린다. 단백질이 부족한 스님들이 글루타민이 들어 있는 밀가루에 끌리기 때문이다. 고기가 들지 않은 잡채에 맛이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웬걸 졸깃졸깃한 당면발에 아삭아삭 씹히는 우엉맛이 그만이다. 시원한 솔바람 부는 산사에 마음이 먼저 가 앉고 두 귀는 풍경 소리를 듣는다. 해맑은 스님의 얼굴이 찻물처럼 고요하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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