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뒤비 '중세의…' 현대 결혼제도 기원 파헤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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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1세기 프랑스 왕 필립1세는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 친족간인 앙주백작의 아내와 결혼, 교회로부터 파문당할 위기에 처한다.

왕은 지옥불에 떨어지는 형벌을 감당할 만큼 열렬한 연애에 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눈하나 깜짝않고 근친혼이며 중혼을 저지르는 방탕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양자 택일만으로는 불충분한 정답이다.

중세인들에게 결혼과 연애는 별개의 문제였고, 고조 할아버지가 같은 인척간의 결혼은 금기가 아니었음은 참고해야 하기 때문.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 는 현대인의 결혼관은 '가족의 해체' 와 함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지만, 중세 서구사회에서는 아예 도전당할 권위조차 서있지 않았다는 것이 콜레쥬 드 프랑스 교수를 역임한 중세사학자 조르주 뒤비 (1919~1996) 의 조언이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거장으로 꼽히는 뒤비의 대표적인 친족관계 저작 '중세의 결혼 : 기사.여성.성직자' (새물결) 는 현대 결혼 제도의 기원을 거슬러 비춰보는 거울이다.

뒤비는 수도원의 문헌집.왕실의 연대기 등 중세 가족사에 대한 흔치않은 사료를 그러모아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재구성하는 대가의 솜씨를 보인다.

그에 따르면 당시 세속사회, 즉 봉건제후와 기사들의 결혼은 가문의 보존이 주된 목적. 심지어 재산이 분산되고 후계자간 경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맏아들만 결혼하는 전통조차 눈에 띈다.

기독교의 금욕적 관점에서 보면 결혼은 자손생산이 유일한 긍적적 기능이었고, 성적욕구를 해소하는 기능은 마지못해 인정할 따름이었다.

성직자들은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 이라고 빈번히 적어놓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공식결혼에 포섭되지못한 이들이 상속권이 없는 비공식 동거를 하는 것은 불륜 아닌 당연지사 였다.

중세의 '연애' 란, 주군의 부인과 젊은 기사의 사랑처럼 '결혼' 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연애는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애인들은 서로 의무감없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무상 (無償) 으로 베풀지만, 결혼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의지에 복종해야 하고 결코 서로를 거부하면 안된다는 의무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11세기 앙드레 르 샤플렝의 '연애론' 에서)" 뒤비가 이 시기에 주목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11세기 전후는 사르트르 주교가 필립1세를 파문시키려 했던 것처럼, 기독교적 결혼관이 세속 기사들의 결혼관에 간섭하면서 갈등을 일으킨 시기였다.

뒤비는 이 양쪽 가치가 절충을 이루면서 청혼.공증인 입회하의 결혼계약.약혼.들러리와 면사포같은 예식형태를 비롯, 현대까지 이어지는 결혼의 기본 구조가 정착된 것으로 파악한다.

중세식 결혼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유일한 가치였던 여성은 '게임의 졸 (卒)' 일 따름. 초기에는 중세에 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했던 뒤비는 81년의 이 저작을 전후로 성.가족.결혼, 그리고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지평을 넓혀간다.

90년대초 미셀 페로와 공동편집한 '여성의 역사' 와 생애 마지막 저작 '12세기의 여인들' 은 남성중심의 역사 속에 가려져온 여성의 이야기를 복원하려는 뒤비 자신의 답변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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