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全中聯'이 나와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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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목소리 큰 사람만 이기는 사회는 썩는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사회의 이익 집단들은 자원배분을 왜곡해 경제효율을 크게 해친다" 고 설명한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이런 문제를 평생 들고 팠다.

그가 '집단행동의 논리' 라는 책을 통해 꿰뚫어본 것은 두가지다.

어떤 이익집단이고 사회 전체의 이익과 어긋나는 일을 하게 마련인 반면 정말로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익집단은 생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국 지하철 승객 연맹' 은 없어도 '지하철 노조' 는 진작에 생겨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식이다.

올슨은 나아가 '국가의 흥망성쇠' 라는 책에서 "이익집단들을 적절히 다루지 못하는 사회는 '조직의 관절염' 에 걸려 망한다" 는 섬뜩한 얘기까지 했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입만 열면 국가.사회를 위해 내 한몸 바쳤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몸 바치기 전에 먼저 표를 받아 당선돼야 하고 그러려면 목소리 큰 집단을 위해 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인.관료들이 그 표본이다.

이 사회에는 '전국 중산층 연합' , 줄여서 전중련 (全中聯) 이란 단체가 없다.

민도 (民度)가 낮아서가 아니다.

어느 사회에서든 목소리 큰 소수는 이익집단을 만들면 열을 들여 백을 얻으리라는 계산이 선다.

하지만 말없는 다수는 열을 들여도 기껏해야 대여섯을 건질까 말까다.

사회운동가가 나서 주면 '무임승차' 할 사람은 많아도 스스로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아무리 '전중련' 이 없기로서니 지금의 정치권.정부는 올슨의 논리를 너무나 그대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나는 하류층' 이라는 사람이 54.3%로 전국민의 절반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기존 중산층 3명 중 한명은 경제위기 이후 하류층으로 떨어졌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중산층 무너지는 소리가 정치인.관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귀머거리인가? 다행 (?) 스럽게도 아니다.

87년 3월 이후 벌써 네번이나 농어촌 부채경감이 되풀이된 것을 보면 귀먹기는커녕 아주 엷은 귀를 가진 사람들이다.

적어도 농.수.축협이라는 큰 이익단체에는. 중산층의 빚을 탕감해 줬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농어촌대책이 되풀이되며 깊어진 도덕적 해이를 중산층까지 맛보았다간 진짜 큰일 난다.

대신 이 정부는 중산층 몰락을 일파만파 (一波萬波) 로 키워놓은 연대보증의 고리를 끊는 비상조치를 환란 초기에 취했어야 했다.

금융기관들에는 큰 충격이었겠고 보증 없이는 대출 못받을 사람들 또한 큰 고통을 겪게 됐겠지만 전시 (戰時)에는 비상한 결단이 합리적이다.

이제는 때를 놓쳤다.

이미 전사자는 수없이 나왔고 보증채무를 힘겹게 때운 사람과 아직도 버티고 있는 사람 사이의 형평도 문제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할 것 하나는 소비자 파산제도를 고치는 일이다.

최근 나온 '새로운 출발 소비자 파산을 아십니까' 라는 책을 읽어본 정치인들이 과연 몇명이나 될까.

심병연 (沈昞聯) 전주지법 수석부장판사가 쓴 이 책은 개인에 대한 '워크 아웃' (기업개선작업) 인 소비자 파산제도가 현행법상 유일한 중산층 회생책이며, 이 제도가 널리 쓰이게 하기 위해서는 법규정 일부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예컨대 지금은 똑같이 파산을 해도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지킬 수 있으나 9급 동 (洞) 서기는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힘 자라는 대로 빚을 갚고 무일푼이 되더라도 직업은 가질 수 있어야 다시 일어설텐데 지금의 파산법은 무려 70여종의 직업을 파산자들로부터 엄격하게 격리시켜 놓고 있다.

沈판사는 은행임원 등 파산자로부터 꼭 떼어놓아야 하는 직종이 아니라면 웬만한 직업은 파산자들에게도 문을 열어줘야 중산층의 워크 아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

나아가 퇴직금도 절반만 압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78, 83년 두차례나 연방파산법을 고쳐 파산자에 대한 직업상 차별을 줄였고 일본도 90년에 파산자의 직업보장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우리 정치권은 파산법을 한번 들여다보기나 했을까. 정말 '전중련' 이라도 일어나야 할 세상이 아닌가.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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