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세상보기] 여왕을 위한 다섯번의 기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 God Save The Queen' 은 1740년에 초연됐다고도 하고, 그보다 1백년도 더 된 1622년에 작곡됐다고도 한다.

작사자.작곡자 모두 불명 (不明) 이지만 가사는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왕으로 추대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그래서 여왕을 구했다는 말도 신이 선택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첫절의 절반만 인용하면 이렇다.

"신은 우리의 자비로우신 여왕을 구하셨다. 고귀하신 여왕이시여, 만수무강 하소서. 신은 여왕을 구하셨다. "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오는 19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방문한다.

평화의 메시지를 갖고 올 여왕은 영국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분. 그러나 얼마전 마음 고생이 컸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세자빈의 결혼생활이 참담한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막내아들 에드워드를 6월에 또 장가보내는데 평민 1천명을 하객으로 초대한다고 한다.

부디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잘 살라는 여왕의 소망이 담긴 것이 아닐까.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그러나 영국 여왕은 결코 인습의 노예가 아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일단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어느 급진주의자 못지않게 단숨에 해치우는 나라다.

권위의 표본인 전통의 잉글랜드은행 (英蘭銀行) 을 하루 아침에 정부 간섭으로부터 독립시켰다.최근에는 세습 상원의원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개혁을 단행했다.

영국 여왕은 이 때마다 개혁을 추인하는 형식적인 최종 결재자의 역할을 한다.

이런 개혁은 모두 노동당 총리 토니 블레어의 젊은 힘에서 나온 것이다.

여왕이여, 총리를 구하소서. 최근 여왕은 블레어 총리의 친미정책을 목도하고 있다.

얼마전 한 미국 평론가가 영.미 합병론을 들고 나왔다.

영국이 미국 10여개주의 투표권과 맞먹는 대표권을 갖는 조건으로 USA 연방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상이 나올 정도로 블레어의 대외정책은 미국과 밀착돼 있다.

때문에 유럽을 이끄는 미국의 패권 (覇權) 은 영국의 지지에 힘 입은 바 크다.

최근 미국의 세르비아 공습에 뜨악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유럽, 특히 프랑스 같은 나라는 그래서 블레어를 경망스런 미국의 앞잡이라고 눈을 흘긴다.

총리여, 대통령을 구하소서. 세르비아 공습을 강화하고 있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갈구하는 세계 여론의 따가운 시선과 밀로셰비치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퇴유곡 (進退維谷)에 빠져 들고 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핵우산 아래로 숨었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도시는 폐허화되고 산업시설은 회신 (灰燼) 되고 있다.

대체 코소보같은 오지 (奧地)에 무슨 엄청난 국익이 걸려 있길래 이렇게 외교전이 아닌 실전의 길로 치닫는가.

대통령이여, 코소보를 구하소서. 학살과 기아 (饑餓).이산 (離散) 으로 얼룩진 코소보 피난민 캠프의 참상을 취재한 김석환 (金錫煥) 특파원의 기사가 중앙일보에 실렸다.

그 기사는 "과연 신은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고교에서 윤리를 가르친 송광용 교사의 첫번째 대답은 이렇다.신은 코소보의 참상을 막지 못한다.

결국 전지전능 (全知全能) 하지 못하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이란 있을 수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번째 대답은 이렇다.

신은 인간을 행복하라고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에서 너무 고생만 한다.

그래서 인간은 내세에서 영혼이라도 행복해져야 한다.

덕을 쌓고도 고생만 한 사람은 보상을 받는다.

대신 악을 저지르고도 안락을 누린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

보상과 심판은 신의 몫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 (해야) 하는 것이다.

코소보여, 신을 구하소서.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