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세일물량 확보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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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주부 이문숙 (서울 구로동.37) 씨는 지난 주말 백화점 봄 정기세일에 들렀다가 여름 상품이 많은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 예년 같으면 봄세일 행사가 끝나는 마지막 주에 '맛뵈기' 로 여름 신상품을 한 두 품목 볼 수 있었으나 올해는 롯데.현대 등 대형 백화점들까지 선글라스.반팔 의류.돗자리 등을 내놓았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백화점들의 고민을 알 수 있다. 봄상품 재고 물량이 달려 일단 확보 가능한 여름 제품을 서둘러 내놓고 있는 것.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 이후 제조업체들이 재고를 크게 줄여 빚어진 일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업 재고율 지수 (재고지수/출하지수) 는 지난해 6월 1백17에서 10월 1백이하로 떨어졌으며 지난 2월 80대 이하로 급락했다. 그만큼 재고가 줄어든 것이다.

따라서 백화점 등 유통업체들은 세일 때마다 재고물량 부족으로 초비상이 걸렸다. 특히 의류 등 일부 품목은 이를 빌미로 가격까지 들먹이고 있는 상태다.

◇ 웃돈 주며 물량확보 전쟁 = 신세계백화점은 봄세일에 물량을 대준 유명 제조업체에는 최고 45일짜리 어음을 주던 것을 아예 현금으로 내줬다.

거래업체 입장에선 금리 등을 고려하면 물량을 넉넉히 대준 대가로 10% 정도 값을 더 비싸게 받은 셈이다.

신세계는 이외에도 물건을 충분히 공급한 거래업체에 대해 판매 수수료를 5% 깎아주는 등 유인책을 쓰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의류.구두 등 패션상품을 중심으로 물량확보에 차질을 빚어 사전에 제품 값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주고 생산을 독려하고 있을 정도" 라고 말했다.

다른 백화점들도 마찬가지. 롯데는 각 거래업체에 대해 안정적인 물량을 공급해 매출을 증대시킬 땐 마진을 추가로 1~2% 정도 더 얹어 주는 매출목표 관리제 (MBO) 를 도입했다.

현대도 물량 확보를 위해 수수료 인하는 물론 납품 업체 직원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해 함께 등산을 다니는 등 '아부작전' 까지 펴고 있다.

◇ 재고를 용납하지 않는 제조업체 =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은 '만든 물건이 팔리면 그때 다시 생산한다' 라는 전략으로 재고를 예전보다 50% 이상 줄이고 있다.

코오롱상사의 경우 일일물류 시스템을 구축해 대리점에서 물건이 팔리는 대로 다음날 하나씩 보충해 주는 방식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울북창동 일대의 중소형 임대창고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가는 추세. 이 창고들은 LG패션 등 대형 의류.제화업체들의 이른바 '간이 물류창고' 로 롯데.신세계.미도파백화점은 물론 명동.남대문시장 등 국내 핵심 상권에 매일 물건을 공급하던 중간기지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제조업체들이 지난해부터 '재고와의 전쟁' 을 벌이면서 이런 창고가 필요 없어진 것. 물량부족이 계속되면서 제품가격도 들먹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부 청바지 브랜드는 신제품이라는 이유로 값을 지난해보다 30% 정도 올렸다" 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 전진박사는 "IMF 이후 제조업체들이 '재고는 현금 흐름을 악화시켜 부도로 이어지게 하는 주범'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고 풀이했다.

김시래.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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