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문인극 '양반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갓 데뷔한 20대 초반의 신인작가 이호철은 같은 연배 여류 신인작가 한말숙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였다.

그저 때리는 시늉만 하기로 돼 있었고, 연습때는 곧잘 하더니 막상 실제 공연무대에서 잔뜩 긴장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로 뺨을 세게 갈겨버린 것이다.

만원을 이룬 관중들은 실감있는 연기를 즐겼겠지만 맞은 한말숙과 때린 이호철은 물론 참여 문인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단역 (端役) 이었기 망정이지 이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연극을 망칠 것은 정한 이치였다.

이들은 곧 퇴장해 무대 뒤에서 한동안 입씨름을 벌였으며, 그 때문에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56년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문인극 '살구꽃 필 때' 가 남긴 에피소드다.

이 연극에는 김말봉.김동리.조연현.손소희.천상병 등이 출연했는데 술마시는 시늉만 하고 퇴장하기로 돼 있던 천상병이 진짜 술을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문단의 화제로 남아 있다.

이것이 해방후 최초의 문인극이었고, 그 뒤 대여섯 차례의 문인극 공연이 있었지만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문인들이 연극에 참여한 역사는 매우 깊다.

무엇보다 1920년대의 신극 (新劇) 운동이 상당수의 문인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이다.

김기진.윤백남.이서구.조명희.마해송.홍사용 등이다.

그렇게 보면 문학과 연극의 유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셈이다.

문학이 혼자 하는 예술이고, 연극이 여럿이 공동작업에 의한 예술이라는 점에서 문학과 연극은 이질적인 듯 싶지만 연극의 대전제가 되는 희곡을 문학작품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보면 두 예술은 단단하게 맺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평소 글로만 대하던 문인을 무대에서 직접 보게 되면 그들의 문학과는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울 것이다.

어제 오늘 이틀간 동숭동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공연되는 문인극 '양반전' 은 지나간 역사를 오늘의 현실에 빗대 풍자한 블랙 코미디다.

황금찬.조경희 등 원로부터 김국태. 정연희. 문정희 . 이근배. 김종해. 박정희 등 중진과 중견, 그리고 신인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문인들이 출연하지만 그들의 연기력을 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던 유현종이 연습중 과로로 쓰러진 것도, 공연의 수익금이 전액 결식아동돕기 기금으로 쓰인다는 것도 이 공연의 뒷얘기로 남겨지리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