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상생을 위한 과거사 정리여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사 규명을 강조하고 국가기관의 자발적 고백을 주문하자 관련 국가 기관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국정원이 즉각'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가칭)를 만들겠다고 했고, 열린우리당은 국회 내에 '과거사 진상규명 특위'를 만들자고 나섰다. 과거의 잘못을 밝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데 반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옳다고 무작정 밀어붙인다면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다.

우선 지금이 과거사 규명에 국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인지, 청와대와 여당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내듯이 이 문제에 몰두할 만큼 여유가 있는 때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과거 청산작업은 일단 시작되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폭발력과 인화력이 강한 사안이다. 온 나라가 순식간에 소용돌이에 휘말려 욕하고 손가락질할 것이며, '홍위병'과 '완장부대'의 출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다 보면 자칫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시비로 번지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노 대통령은 "진상을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를 적극 지지한다는 여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목소리에선 벌써 적의가 묻어나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낸 김우전 광복회장의 충고를 경청해야 한다. 그는 "정치권은 민족적 큰 일을 위국.위민의 명분을 세워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며 노 대통령에게 상생의 큰 정치를 주문했다. 친일 청산을 외쳐야 할 광복회장이 상생을 촉구하고, 상생의 정치를 강조해야 할 대통령이 친일 청산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주객전도의 모습 아닌가.

과거사 정리는 현재 삶을 보다 보람되고 활력 넘치게 하기 위한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고단한 상황을 외면하고 은폐하기 위한 과거 캐기가 되어선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상생을 위한 과거사 정리를 해야 한다는 광복회장의 충고에 귀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