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부 구조개혁의 실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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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역시 이번에도 정치권력의 논리는 개혁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재.보선과 내년 총선에서 표 떨어지는 소리, 그것도 가장 확실한 여권 지지표라고 할 수 있는 공무원들의 표 떨어지는 소리가 당장 귀에 들리는 듯한데, 개혁은 무슨 개혁. 3월 23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정부운영 및 기능조정 방안' 이라는 제하의 정부 문건은 개혁 과제들을 대하는 정치권의 이런 시각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부구조 개혁에 관한 한 이 정부는 이제 더 이상의 관심도,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능력도 없음을 국내외에 알려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방안 마련에 46억원이라는 막대한 국민의 세금이 민간회사들의 컨설팅 비용으로 들어갔고 정부 내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본래 일을 제치고 동원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국무회의는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본전 생각나게 하고, 인건비도 못 건지게 만든 실망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작은 정부의 구현을 위해 부처를 통폐합해 보겠다던 기획예산위원회의 애초 방안들은 이번 국무회의에서 예외없이 전멸했다.

'개방형 임용제도의 확대' 와 같이 공무원들의 철밥통과 철옹성을 타파하겠다던 초안도 그 시행기간이 총선으로 인해 정부개혁 불능의 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 말까지로 늦춰 잡히게 됨으로써 이 제도의 실제 시행 여부가 묘연해져 버렸다.

게다가 각 부처의 핵심자리부터 이 제도를 적용하겠다던 당초의 개혁적인 담론은 이번 국무회의를 거치면서 아예 종적을 감춰버리고 대신 '공석이 되는 자리 메우기' 로 후퇴됐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 언론탄압을 일삼던 독재정권의 잔재라 하여 해체시켰던 공보처를 연상시키는 조직을 불과 1년만에 '국정홍보처' 라는 문패로 바꿔 부활시키려는 듯한 안을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1년 전 내린 국정 최고책임자의 결정이 단견이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라 과연 이 정부가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게 될 정도로 이 방안은 반개혁적이다.

정부의 각종 개혁 작업이 국내외에 잘 홍보가 되지 않아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개혁은 포장으로 될 일이 애초에 아님을 우리는 지난 정권들에서 이미 여러 번 확인한 바 있다.

한편 지난해 2.28 정부조직개편때 불발 내지 미흡에 그쳤던 사안, 즉 정부의 돈과 사람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조직들은 이번에 모두 재론돼 기획예산처는 정식 국무위원으로서의 장관 조직으로, 중앙인사위원회는 대통령 직속의 장관급 조직으로 신설하는 방안이 이번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없애는 부처는 하나도 없고 신설부처의 수만 늘리는 소위 정부 몸집 키우기가 시도된 것이다.

지난 1년 내내, 아니 지금까지도 민간기업들에는 구조조정을 통한 몸집 줄이기를 계속 강도높게 주문해 오고 있는 이 정부가 스스로에 대해서는 몸집 키우기를 시도하고, 직원들의 동요를 생각해 개혁을 지연시키거나 아예 백지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해놓은 상태에서 이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민간부문에서의 구조조정을 더 이상 주문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또한 이번에 국무회의를 통과한 기획예산처와 중앙인사위원회 설치 방안에는 이 기관들에 대한 대통령의 자의적인 권력 오남용 (誤濫用)가능성을 제어하는 장치들에 관해 단 한줄의 언급조차 없었다고 하는 점 역시 이 정부의 정부개혁 작업에는 정치권력적 논리가 개혁의 논리보다 우선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지난해 가을 정부조직개편 논의가 시작되면서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과 시민단체 종사자들, 그리고 정부 내외의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이 정부에 대해 이번 제2차 정부조직개편에서만큼은 지난 제1차때의 졸속을 반복하지 말자고 부단히 주문해 왔다.

그러나 이번 방안을 보면서 그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이런 주문들이 한낱 연목구어 (緣木求魚)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곤 차기 정부로 기대를 돌리고 있다.

개혁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유지되는 표도 물론 있겠지만 더 붙지 않거나 떨어져 나가는 표도 만만치 않음을 정치권 인사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황성돈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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