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잡이 계좌추적…백지공문 들고 '사생활' 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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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민의 불신을 가중시키는 계좌추적 남용은 '영장에 의하지 않는 계좌추적' 의 급증에서 비롯한다.

수행업무의 성격상 계좌추적이 허용된 세무관서.선관위.공직자윤리위.금융감독원 등 이른바 정부기관의 계좌추적이라지만 '추적의 순수성' 에 의구심이 따르기 때문이다.

현행 금융 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과 이들 기관의 개별법은 기관장 명의의 '협조 요청' 공문만으로도 금융기관에 추적 대상자의 금융거래 정보를 요청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영장주의' 원칙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협조 요청서' 에는 추적대상 인물과 계좌를 특정하는 게 원칙. 그러나 실제 금융기관 창구에서는 이같은 원칙과 절차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정계좌를 지칭하지 않고 추적 대상자의 모든 계좌 내역 공개를 요구하거나 특정 금융기관이 아닌 전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공문을 띄우는 사례가 허다하다는 얘기다.

한 술 더 떠 "정부기관 직원들이 해당기관장 직인만 찍혀있는 '백지' 공문 용지를 들고다니다 필요에 따라 즉석에서 추적 대상자의 이름을 적어 금융기관 창구에 들이미는 사례도 적지 않다" 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영장을 필요로 하는 수사기관의 계좌추적에도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가장 우선적으로 지적되는 점은 법원의 낮은 영장기각률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97년 계좌추적 등을 포함한 압수수색영장에 대한 법원의 영장발부율은 99%를 상회한다.

계좌추적에 대한 법원의 1차적인 제동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법원의 영장심사 강화 필요성이 강조된다.

이와 함께 계좌추적 남용 방지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계좌추적 승인기관의 일원화. 수사기관의 경우 법원의 영장심사, 정부기관의 경우 '협조요청서' 만으로 가능토록 돼 있는 이원화된 계좌추적 허가시스템을 법원이나 다른 독립된 기관의 일원화된 통제 아래 두자는 제안이다.

실제로 93년 금융실명제를 기획했던 '금융실명제 기획단' 에서 이같은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현재 금융실명제법의 시행령에만 규정돼 있는 금융거래정보 요구 대상자에 대한 10일 이내 통지의무와 위반시 형사처벌규정을 모법에 담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일선 세무서장의 공문으로 가능토록 돼 있는 세무관서의 계좌추적 요건을 강화해 국세청장 또는 지방국세청장 명의의 공문으로 한정하는 것도 준 수사기관의 계좌추적 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이라고 주장한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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