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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의 매너, ‘갑’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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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몇 년 전부터 잡지사들은 일반 독자 대상 외에 ‘기업’이 고객인 잡지를 만들고 있다. 은행이나 기업의 사외보(社外報)가 이에 속한다. 우리뿐 아니라 세계적인 잡지사들도 이 같은 고객 잡지(custom publishing)팀을 두고 있고, 매출의 30% 이상을 이 분야에서 낼 정도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

사외보를 만들 때는 ‘갑’과 ‘을’로 명시된 계약서를 쓰는데 ‘을’로 자리매김하고 보니 저절로 인생 공부를 하는 것 같다. ‘갑’이 누구냐. 돈을 쓰는 사람이다. 당연히 일 잘하는 ‘갑’일수록 저비용으로 고효율을 내려 하기 마련이라 저쪽의 의도와 비위를 맞추는 것에 노심초사하게 된다. 해당 기업의 ‘컨펌’에 울고 웃는 ‘을’의 숙명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을’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야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서점에 가보시라. 감동을 주는 법, 마음을 얻는 대화법, 고객을 하늘로 모시는 법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은가. 『을의 법칙』 같은 직접적인 제목도 보이니 돈을 쓰는 쪽이 아니라 버는 쪽에 대한 지침은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돈을 쓰는 쪽의 매너에 대한 책은 왜 없는 걸까. 정작 ‘을’의 게으름보다 ‘갑’의 변덕 때문에 원하는 결과물이 안 나오는 상황을 몇 번 겪고 보니 ‘갑의 법칙’ 혹은 ‘발주의 기술’ 같은 지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발주자는 명확한 방향과 정확한 지침을 줘야 한다. 원하는 것을 ‘구체적인 언어’로 말하고, 되도록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샘플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걸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100% 알겠는가. 심지어 부부간 기념일 선물도 “알아서 사와”보다 ‘어디 브랜드 무슨 디자인’으로 콕 집어 말하는 것이 대세다.

발주자 쪽 최고책임자는 자신이 일을 주도하거나, 아니면 직원에게 일임하는 결단을 내려줘야 한다. 디자인이나 콘텐트같이 정답이 없는 일은 특히 그렇다. 실무자 의견을 좇아 몇 번이고 수정해서 만든 샘플이 최고책임자 선에서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동상이몽은 만국 공통인지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는 계약금이나 기간 등의 기본 사항 외에 ‘최고책임자와의 독대’를 계약조건으로 내건다고 한다.

물론 ‘가격 대비’라는 잣대도 필요하다. 가장 난감한 말이 ‘예산은 적지만 윗분들 눈이 높아요’다. 어찌 10만원에 루이비통 핸드백을 살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예산이 적으면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게 ‘갑’의 매너다. 대신 차 떼고 포 떼고 핵심만 살려서 오더하면 공정이 단축되어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좌우간 이렇게 몇 년을 ‘을’로 살다 보니 나 스스로 ‘갑’이 될 때 매너가 좀 좋아졌다. 디자인팀에 구체적인 시안이나 이미지를 먼저 제시하고, 프리랜서 작가에게도 명확하고 꼼꼼한 기획안을 주게 되었다. “밥 먹으러 가자!”고 막연하게 말하기보다 “김치찌개 먹으러 갈래?” 한다. 스파게티를 원하는 후배들은 안 가면 되니 밥 사는 사람은 얼마간 돈도 굳고, 의견일치를 본 메뉴이니 서로 기분도 좋을 일 아닌가.

그나저나 서점가에 『갑의 법칙』은 없던데 블루오션으로 여기고 한 권 내봐? 혹시라도 기업의 홍보 담당자들이 줄줄이 사주는 이변이 일어나 돈도 벌고, 사외보 제작하기도 좀 쉬워질 줄 누가 알겠는가.

이숙은 ‘HEREN’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