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소리꾼 김명곤, '장터떠돌며 광대판 벌여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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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광대, 딴따라에서 이제는 예술가 소리까지 듣고 있지만 거꾸로 자신을 스스로 한낱 떠돌이 유랑극단 광대로 끌어내리려는 남자가 있다.

'서편제' 의 소리꾼으로 잘 알려진 배우 김명곤씨다.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에다 극단 아리랑 예술감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연출가, 혹은 일류배우라는 명성을 등에 업고 다니는 그가 4월이면 트럭에다 간이 무대장치와 배우들을 싣고 장터판 할머니.할아버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삼류 악극배우 우두머리로 길을 떠난다.

무슨 예술세계를 보여주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시골 장터에 판을 벌여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울리는 신파극과 서민의 애환을 담은 트로트 노래를 들려줄 생각이다.

4월 3일에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길을 떠나면 화성.평택으로 돌고 돌아 10월까지 경기도 내 50여개 장터를 떠돌게 된다. 멀쩡한 연극무대를 놔두고 그가 굳이 시골 장터의 서민들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신파극과 트로트 노래를 들려주겠다는 데는 사연이 있다.

그가 줄곧 외치는 '현장 속으로' 라는 신념 탓이다. 나를 보고 싶으면 극장으로 오라는 고자세가 아니라 보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언제라도 찾겠다는 새로운 연극 유통을 이루겠다는 말이다.

도시화되면서 젊은이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대사회 속에서, 역 (逆) 발상으로 철저하게 문화적으로 소외된 시골장터와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움직임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하지만 '배우 김명곤이 어디로 가랴' 싶어 슬쩍 내용을 미리 엿보니 시골장터를 떠도는 떠돌이 약장수 그대로다.

각설이가 풍물패와 함께 흥을 돋워놓으면 IMF에 실직당하고 가출한 가장 김달식과 그를 찾는 가족 이야기를 엮은 신파 악극 '아빠의 청춘' 이 이어진다.

그리고 나면 여가수가 어우동 분장을 하고 간드러지게 달타령을 부르는가하면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가수가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를 불러제낀다.

신명나게 북치고 장구치고 한가락 걸쭉하게 뽑아내던 극단 아리랑 배우들은 김씨의 속내를 이해하면서도 트로트 가요 부르는 일에는 어색해했다.

이번 장터공연에 출연은 안하지만 악극을 비롯해 장터극의 큰 얼개를 짜맞춘 연출가 김명곤씨는 "예술가 연하면서 관객과 멀어지느니 보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그게 의미있는 일" 이라고 이들을 설득해나갔다.

하지만 배우들 못지않게 본인도 부담이 컸던게 사실. 김씨는 "정형화된 연극무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김명곤 연출' 로 악극을 올리는 것은 모험" 이라면서도 "악극도 우리 전통연희로 받아들여 현대화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재미있다" 고 말한다.

대중과 가장 잘 소통할 수 있는 악극을 가다듬어 새로운 연극적 틀로 발전시키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장터공연의 대장정은 경기문화재단의 재정후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지난해 남사당패의 이야기를 몸소 쓰고 연기했던 김씨의 '유랑의 노래' 를 관람한 경기문화재단 관계자와 협의 끝에 경기도민들에게 볼거리를 주고자 장터 떠돌이극을 시작한 것이다.

올해 1억 5천만원을 지원받았지만 내년에는 예산을 늘려 더 많은 장소에서 장터공연을 벌일 계획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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