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희망을 읽을 수 없는 대통령 경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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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아쉬움을 남긴다. 지금 국민은 희망을 잃고 있다. 거리는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빈곤층.청년실업자로 넘쳐난다. 불황으로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들은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 물가고는 서민.주부를 옥죄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대통령은 '당장 피부로 느끼는 경제가 어렵다'는 한 줄의 언급만 했다. 대신 장시간에 걸쳐 과거 청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국민이 대통령과 같은 인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모으고 앞날을 열어나갈 것인지 크게 걱정된다.

노 대통령은 국회에 과거사 진상규명특위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친일과 함께 국가권력의 인권침해와 불법행위도 다루라고 했다. 이럴 경우 정기국회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뻔하다. 열린우리당도 여러 번 다짐했던 국회에서의 '민생과 경제살리기'는 물건너간다. 대신 상설화.첨예화한 정쟁만 기승을 부릴 것이다.

경축사에서 드러난 노 대통령의 역사인식엔 모순이 보인다. 노 대통령은 우리의 지난날을 '분열과 반목' '반칙과 특권의 시대'로 규정했다. 이게 사실이면 노 대통령도 인정한 '신화와 같은 경제적 성취와 민주주의 발전' '세계 11위의 경제'는 뭔가. 우리가 무슨 수로 대통령이 말한 '100년 전과는 달리 우리의 역사와 영토를 충분히 지킬 힘을 가진 국가'가 됐는가. 역사엔 공과(功過), 그리고 명암이 함께 있다.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다.

물론 과거의 잘못에 대한 규명과 반성은 필요하다. 하지만 1세기에서 반세기에 이르는 과거사 정리작업을 국회의원.정당이 무슨 수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 역사를 현실정치가 재단하고 정파적 이해에 따라 해석할 경우 소모적 정쟁은 끝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사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하고, 정치적으로 독립이 보장되며, 연구.분석 작업을 수행할 능력을 갖춘 국회 내 전문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대통령과 정부.정치권이 정말로 챙겨야 할 일은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다. 그래야만 국민이 비전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