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호상 박사를 기리며]민관식 전 국회부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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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자네는 내 22대 손이야. 조상님 제대로 모셔야 해. " 71년 22대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몸소 장관 집무실로 찾아오신 안호상 선생이 내게 건넨 첫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데,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생이 살아온 개인의 역사를 나는 '20세기 우리 민족의 고난과 희망의 역사' 라고 단언하는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척박한 우리 철학계를 일깨우기 위해 활동하신 그분이 종내는 2002년 월드컵 유치에까지 힘썼던 점을 보면 누구도 나의 이 단언에 이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청년기에 일본.중국.독일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일찍이 외국 문물에 눈을 떴지만,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이라는 깨달음으로 민족주체성 확립에 몸을 내던지셨다.

학자로서 선생은 먼저 식민지시대 우리 철학.사학.교육계에 만연한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하는데 앞장서셨다.

보성전문학교 교수 시절에 조선철학연구회를 창립,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며 민족철학 정립에 나선 것부터가 그렇다.

선생은 초대 문교부장관으로 망가진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단군왕검의 '홍익인간 (弘益人間)' 이념을 민족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이후 국회 참의원.초대 새마을금고연합회장.대한체육회 고문.민족학회 총재.배달학회장.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의 회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셨지만 선생의 모든 활동을 꿰뚫는 하나의 목적은 민족 주체성을 확립해 민족정기를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나는 문교부장관으로 있을 때 중.고교 필수한자 1천8백자를 제정했다.

요즘도 한자 병기를 놓고 이야기들이 많은 모양인데, 당시 한자 1천8백자가 제정되자 선생이 나를 찾으셨다.

우리 글의 위대함을 팽개친 처사가 아니냐며 역정을 내셨다.

한글사용이 위축되지 않을까를 걱정하신 것이다.

그때 나는 선생께 "한글전용을 이야기하시려면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라고 대들었다.

'22대 손' 밖에 안되는 나의 무례한 대거리도 선생은 너그럽게 받아들이셨다.

혹시라도 민족 정체성을 흩뜨리는 일이 될까 걱정하신 선생의 깊은 뜻에 존경의 염을 떨칠 수 없다.

20세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이 달게 짊어지셨던 민족 수난사를 새 세기에 남은 사람들이 이제 희망의 역사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의 명복을 삼가 머리숙여 빈다.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헌정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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