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국보'가 남긴 발자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4후퇴 당시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6.25때 피난을 못한 바람에 수복후 부역자 (附逆者) 딱지가 붙어 곤욕을 치렀던 무애 (无涯) 양주동 (梁柱東) 은 피난을 서둘렀다.

열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신문사에 들렀다가 복도에서 서성대고 있던 같은 처지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 (孫基禎) 과 동양화가 묵로 (墨鷺) 이용우 (李用雨) 를 만났다.

양주동은 "우리나라 국보들이 다 모였군. 국보를 이렇게 푸대접해서야 쓰나"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후 양주동은 자칭 '국보' 로 행세했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은 일본 와세다 (早稻田)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 숭실 (崇實) 전문학교 영문학교수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양주동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로 문명 (文名) 을 날렸다.

그러던 어느날 양주동은 돌연 국문학자로 변신했다.

37년 학술지 '청구학총 (靑丘學叢)' 에 논문 '향가 (鄕歌) 의 해독 (解讀)' 을 발표하면서 오구라 신페이 (小倉進平)에 도전했다.

경성 (京城) 대학 교수 오구라는 29년 발표한 '향가 및 이두 (吏讀) 연구' 를 통해 신라 향가를 최초로 해독한 조선어연구의 권위 (權威) 였다.

양주동이 향가연구에 뜻을 둔 것은 35년 무렵이다.

평소 향가가 일본인에 의해 비로소 해독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다가 스스로 향가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주동의 향가연구는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에서 오구라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42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조선고가 (古歌) 연구' 는 육당 (六堂) 최남선 (崔南善) 으로부터 "1백년 뒤 남을 한권의 책" 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향가연구의 정본 (定本) 으로서 위치를 유지해 왔다.

양주동은 두주불사 (斗酒不辭) 의 술과 재치가 철철 넘치는 입담으로 유명했다.

"내 이름이 양주동이니 양주 (洋酒) 동이, 입이 걸어 양 (兩) 주둥이오" 라며 희희낙락했다.

돈에 대해선 지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주례를 부탁받으면 주례값을 흥정하고, 원고청탁이나 방송국 출연요청이 오면 으레 선금을 요구했다.

신문은 국보가 읽어주는 것만도 영광이라며 언제나 무료구독이었고, 집에 도둑맞을 물건이 없다는 이유로 방범비조차 내지 않았다.

양주동이 오랫동안 재직했던 동국대학교 출판부는 최근 '양주동전집' 12권을 완간하고 이를 기념하는 학술발표회와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희대 (稀代) 의 천재이자 기인 (奇人) , 그리고 괴짜였던 고인이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볼 좋은 기회가 됐으리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