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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의 우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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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알려진 대로 하토야마는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는 전후(戰後)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냈고, 부친은 외상을 역임했다. 조부였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는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의 국가사회주의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1936년 중의원에 당선됐다. 유럽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범유럽(PAN-EUROPA) 운동’의 창시자가 된 리하르트 쿠덴호프 칼레르기가 1935년에 쓴 『인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국가』란 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직접 번역해 출판까지 했다.

쿠덴호프 칼레르기에게 자유는 최상의 가치였다. 또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서 자본주의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평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가 태동하고, 나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대항하는 국가사회주의가 탄생한 시대적 상황을 깊이 우려했다. “오로지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도 결국은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켜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자유와 평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근본주의에 빠졌을 때 가져올 참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못하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필요하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중 마지막 이념인 ‘박애(fraternity)’에서 찾아야 한다고 쿠덴호프 칼레르기는 생각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박애’ 대신 ‘우애’라는 표현을 썼고, 이후 우애는 그의 정치사상의 중심가치가 됐다.

전후 일본에 몰아친 마르크스주의 세력의 공세에 맞서 건전한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좌우의 양극단을 배격하고, 우애의 가치에 기초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하토야마 이치로의 소신이었다. 그의 손자로, 미 스탠퍼드대 공학박사 출신 교수에서 정치인이 된 하토야마는 우애의 현대적 의미를 ‘자립과 공생의 원리’로 재정의하고, 우애의 가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하토야마는 탈(脫)냉전 이후 일본 사회는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시장원리주의에 계속 농락당해 왔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를 원리적으로 추구할 때,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이번 금융위기가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우애는 시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자립과 공생의 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우애론이 일본 열도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우애의 정신을 강조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서로 돕고 사이좋게 지내는 공동체적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동아시아공동체 실현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유다.

하토야마는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금융위기로 미국 주도의 일극지배 체제는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향후 20~30년간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 국가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미국과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려고 하는 중국 사이에서 정치·경제적 자립을 유지하면서 국익을 지켜 나가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중소 규모 국가의 공통된 고민이라고 지적한다.

군사력 증강이나 영토 문제, 그리고 과거사 문제는 한·일이나 중·일 양자 차원에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역통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동아시아 통합이 불가피한 이유라고 역설한다. 10년 이상 앞을 내다보고 아시아 공동통화를 준비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과 공존의 원리에 기초한 우애의 정신 위에 평화롭고 번영된 동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하토야마의 주장은 이상론에 가깝지만 매력적이다. 85년 전 쿠덴호프 칼레르기가 유럽통합을 제창했을 때도 동시대인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역사는 꿈에서 시작된다. 하토야마가 자신의 홈페이지(www.hatoyama.gr.jp)에 특별기고문의 한글 번역본까지 올려놓은 것을 보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일본 현대사의 분수령이 될 8·30 총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하토야마의 꿈은 동아시아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