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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북한탐험]22.금강심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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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안민영 (安玟英) 은 그의 넘쳐나는 풍류로 조선 5백년의 시조가 마감되는 기념비적인 가인 (歌人) 이다.

그가 있고 나서 시조는 뚝 끊겼다가 최남선의 현대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의 수많은 작품 중 금강산 시조가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눈이 아니면 옥이로다.

혈성루 올라가니 천상인 되었것다.

아마도 서부진 (書不盡) 화부진 (畵不盡) 은 금강인가 하노라. 그 자신 정양사 누각에 올라 하늘의 사람인 듯, 글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 다할 수 없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파묻히게 된다.

조선 후기의 금강산은 삼천리 강토의 곤궁한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유람이 가능해진다.

그런 나머지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만인의 속담도 생겨난 것이다.

1936년 님 웨일스는 금강산에서 여름 한철을 보냈다.

나는 그녀의 '아리랑' 을 읽기 전에 김성숙 (金星淑) 옹을 만났다.

1967년이었다.

그는 박정희 군사쿠데타 직후 제2공화국 시절의 혁신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한 우렁찬 독립운동가를 마구잡이로 탄압하는 야만에 그는 어이없는 분기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나오자, 껄껄 웃으며 언제 그런 수모를 당했느냐는듯이 도량 넓은 초야의 원로였다.

서울 청진동 노인들의 단골다방 낡은 의자에 앉아 호두알을 단주로 삼아 굴리는 것이 영락없는 산중의 노덕이었다.

그가 바로 '아리랑' 의 주인공 김산 (金山 - 張志樂?) 과 더불어 참가한 광퉁코뮨의 혁명동지였던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다.

김충창은 지하혁명가들이 본명 대신 새로 지은 가명이다.

3.1운동 이전 양주 회암사에서 삭발 입산한 이래 식민지 초기 부두노동자들의 조직투쟁에 뛰어들었다가 한 시기를 금강산에 들어가 그의 이론이 숙성됐다.

법명은 운암 (雲岩) 이었다.

그 뒤로 그는 국외망명.혁명생활의 파란 끝에 임정세력과 합류해 돌아온다.

그에게는 몇 편의 한시가 있으나 정작 금강산을 노래한 것은 없다.

어쩌면 금강산이란 그 산을 노래한 수많은 시편들과는 달리 그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무형의 시로 차 있을지 모른다.

님 웨일스는 금강산을 통해 코리아를 좋아했고 김산을 통해 코리아에의 시대적 예찬에 아낌 없었다.

그녀는 말하고 있다.

'조선은 많은 점에서 극동 제1의 아름다운 나라다. 맑고 푸른 기운이 감돌고 날카로운 능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산들… 경쾌하게 흐르는 시냇물…. ' 그녀는 그런 냇가에서 아낙과 소녀들이 눈처럼 흰 빨래를 하고 있는 것에서도 '순교자의 민족' 을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금강산 만큼 많은 시를 낳은 산도 없거니와 금강산 만큼 많은 시 아닌 시를 낳은 산도 없으리라. 꼭 시로 표현하지 않았다 해서 시와 상관없는 산이 어디 있는가.

시로 표현해서야 그 산의 이름이 세상에 자자해지는 그런 산이라면 그것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하물며 금강산이랴. 나는 정철의 '관동별곡' 을 그의 존왕주의에도 불구하고 절절히 소재가 된 금강산 이상으로 그 문학적 우수성을 인정한다.

그의 후대 사람들이 너도 나도 그를 받들어 '관동속 (續) 별곡' '금강별곡' 들을 한 두편이 아니게 써냈던 것도 그런 증거다.

그러나 금강산은 몇천년의 세월을 거기에 찾아든 시인 묵객들에 대해서 새삼 무심한 것이 내가 본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아무리 사람들의 오관 (五官) 이 동원되어 그것을 보고 듣고 맛본다 한들 언제나 태고 조화의 산으로 거기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지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누가 나를 노래했더냐고 시치미를 떼어도 되는 산이다.

나 또한 나를 앞서서 노래한 금강산을 사절하고 마치 내가 그곳을 찾아간 첫 손님이 되어도 무방했다.

금강산의 시간에는 그토록 착각의 원근법이 들어 있었다.

그런 산을 두고 능란한 구름의 무위가 있어 그 천변만화야말로 금강산을 항상 목욕시켜 새로운 산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산 기슭에서 태어나 산 기슭에서 살다가 묻히는 산악신앙이 유난스러운 겨레붙이인지라 금강산은 그 미모만으로 황홀해 하지 않고 겨레의 기상과 혼을 표상함이 옳다.

고대의 풍류정신이나 화엄사상, 그리고 중세말의 보우 (普愚).나옹 (懶翁) 이나 16세기 조선의 서산 (西山).사명 (四溟).처영 (處英) 들의 치열한 금강산 정기는 그 뒤 일제시대의 뜨거운 민족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산은 사상의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금강산을 그림으로써 오랜 사대 (事大) 의 중국 산수를 청산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었던 진경 (眞景) 이 실현된 것도 금강산의 기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최남선의 대문장 '금강예찬' 에서 딱 한마디 골라내라면 '…금강산은 더욱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볼 것입니다' 라는 것이다.

과연 금강산은 표면의 아름다움만을 보는 것은 만분의 일만 보는 것이다.

금강산은 한 민족의 정신사를 켜켜이 쌓은 문화이기도 하다.

저 상고시대의 고신도 (古神道) 를 닦던 영장 (靈場) 인가 하면 신선사상의 중심이 된 적도 있다.

그것이 불교를 만나 금강산의 진면목을 온통 장엄하게 하지만 그 금강산불교 속에는 여전히 옛 신들과 신선이 의좋게 동서 (同棲)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강산은 그곳에서 널리 펼쳐나가는 자아의 인문 (人文) 이다.

'조선으로 하여금 금강산이게 하자' 는 말은 조선이라는 오묘한 명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결의가 들어 있다.

'금강산은 곧 조선 또는 조선사람이다' 라는 내적 확신이야말로 그 산은 조국애를 낳는 것이다.

그런데 분단 50년을 넘어서 금강산은 절반의 산이 됐다.

오랜 정신풍토로서의 그 산은 깊이 잠들어버렸고 그 잠의 외부에서 오직 유일사상을 표방하는 정치적 현장으로만 여실하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향하다 눈에 부닥친 커다란 너럭바위에 한자 크기 약 2㎡로 새겨져 있는 반초서 '금강산 김일성' 은 보는 사람을 완전히 압도한다.

금강산은 누구의 금강산인가.

이런 물음은 장차 올 금강산의 미지 (未知) 를 위한 하나의 씨앗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의 금강산 주제는 '금강산을 바라본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그것이다.

글 = 고은 (시인.경기대대학원 교수)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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