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 그의 빨강 넥타이엔 경영 코드가 숨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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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1일 승진한 정의선(39) 현대자동차 기획 및 영업담당 부회장은 기아자동차 사장 시절 빨간색 넥타이를 즐겨 매고 다녔다. 빨간색은 기아차의 ‘브랜드 컬러’다. 한마디로 그의 경영화두가 브랜드라는 얘기다.

정 부회장은 평소 “기아차는 품질이나 디자인이 좋아졌는데도 브랜드 파워가 약해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2007년 말 그룹 내 처음으로 기아차에 사장 직속으로 ‘브랜드 전략실’을 만들었다. 이후 명함부터 로고, 해외 대리점 인테리어까지 브랜드 컬러인 ‘빨간색’으로 통일했다.

◆마케팅·영업통 중시=정 부회장은 올 6월 이명박 대통령 미국 순방을 수행하면서 재계의 눈길을 끌었다. 당시 그는 기아자동차 사장이었지만 아버지인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을 대신해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달 만에 부회장으로 승진한 그는 사실상 현대·기아차그룹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익명을 요구한 그룹의 한 고위급 인사는 “1999년 취임한 정몽구 회장이 올 4월 현대·기아차 회장 10주년을 맞아 ‘더 늦기 전에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다”며 “이번 인사로 세대교체도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마케팅·기획·해외영업 출신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버지인 정 회장이 재경·총무 출신을 중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 회장은 철저히 책임을 묻는 인사 스타일이다. 실적이 나쁘거나 노조 파업이 이어지면 즉각 경영진을 교체한다. 반면 정 부회장은 인사 목소리를 그간 거의 내지 않았다. 인사에 개입하면 기존 경영진과의 갈등 소지가 있어 경계했다고 한다. 정 부회장의 효심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말이라면 잘 따르는 현대가 전통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그는 기자와 인터뷰할 때도 “모든 것은 회장님(아버지)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며 “영어를 잘해 회장님이 좋아하실 때도 있지만 아직 배울 게 많다”고 말했다.

◆기아차 시절 마음고생 많아=정 부회장은 35살 때 사장이 돼 고민도 많았다고 술회한다. 2005년 기아차 사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적자를 내자 머리숱이 많이 빠졌다.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탈모가 진행된 것이다. 당시 그는 기자에게 “사장을 맡고 보니 예전과 다르다”며 “탈모의 특효약은 기아차가 흑자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차 원로 경영진이었던 A씨는 정 부회장에 대해 ‘겸손하고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고 평한다.

정 부회장은 2005년 현대·기아차 파업이 심각해졌을 때 이유를 알고자 공장 생산직 직원을 찾았다. 30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세 시간 동안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도 실무진과 마라톤 대화를 할 때가 많다. 정 부회장은 누구와도 잘 어울린다. 2002년 현대차 국내영업담당 부사장 시절에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실무급인 과·차장과 폭탄주를 마신 일도 많다. 2002년 전무 시절 이들과 2차로 노래방에 가 최신 히트곡을 곧잘 불렀다. 간부들과 폭탄주 20여 잔을 넘게 마시고도 도요타 등 경쟁사 이야기가 나오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 경우가 여러 번이다. 그는 ‘가정이 화목해야 경영자로서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 모터쇼에는 종종 부인과 장남(초등학생)을 동반한다.

◆‘차세대 위원회’ 인맥=정 부회장은 미국에서 경영학(MBA)을 공부해 글로벌 경제 사정에 밝다. 그룹 내 측근들도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석사 이상)에 이사·상무급이 많다. 그는 2001년 ‘차세대 위원회’를 만들었다. 본사 주요 부서의 과·차장급으로 40여 명을 선임했다. 매달 한 번씩 현대·기아차의 장기 생존을 위한 전략을 구상하는 세미나를 했다. 여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정 부회장의 인맥이 많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는 고급차인 재규어를 인수해 현대차가 고급 브랜드를 준비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차세대 위원회는 ‘알짜회’라는 일부 반발로 3년 만에 해체됐고 기아차만 활동 중이다. 현재 이 위원회 출신들은 현대·기아차의 부장∼상무급에 많이 있다. 박홍재 자동차산업연구소 상무, 김견 기아차 기획담당 이사가 이 위원회와 관련돼 정 부회장 측근으로 불린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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