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노숙자 5인 실의 딛고 계란빵장사로 재기나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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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머님, 생신때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새해엔 반드시 재기해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정용호 (鄭龍虎.35) 씨는 지난 26일 광주에 있는 노모에게 편지를 썼다.

전화로는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군복무 이후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쓸 말은 많았지만 몇줄 적다가 설움이 울컥 북받치고 눈물이 쏟아져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기술특허까지 받아 조립식 건물 칸막이 제작 업체를 운영하는 중소기업가였던 게 불과 1년 전. 하지만 지난해말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가 터진 데 이어 한 직원이 회사돈 60억원을 횡령해 해외로 도주하는 바람에 鄭씨는 부도를 내고 하루아침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내와 딸은 친척집에 맡기고 공사판을 떠돌았다.

그러나 그마저 일거리가 끊겨 지난 9월부터 서울역.영등포역을 전전하는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어요. 가족들과 이웃들의 냄새가 그리웠습니다. " 와신상담 (臥薪嘗膽) .서울 가양7종합사회복지관이 지난 10월 설치한 노숙자 쉼터 '희망의 집' 에 들어가면서 鄭씨의 재기 몸부림은 시작됐다.

마침 바자 수익금으로 대당 1백만원짜리 계란빵 굽는 장비를 마련한 복지관측이 평소 빠짐없이 공공근로에 참가하는 등 강한 자활의지를 보인 鄭씨에게 장사를 권유했고, 鄭씨는 지난 14일부터 발산역 입구 '풀빵장사 아저씨' 가 됐다.

鄭씨 외에도 계란빵 장사에 나선 '희망의 집' 노숙자는 4명. 89년 동아시아선수권대회 복싱 은메달리스트였던 김철만 (28) , 출판사 기자였다가 정리해고된 김택조 (31) , 전직 자장면집 사장 강진복 (41) , 부산에서 제화점을 운영하다 부도난 강창희 (55) 씨 등. 이들 '계란빵 5인' 은 기존 노점상들의 텃세에 발산역.우장산역과 아파트단지 주변을 매일 옮겨다녀야 했지만 이젠 각자 자리도 잡았고 빵 굽는 솜씨도 제법 익숙해졌다.

하루 매출량은 1인 평균 4백여개. 한개 5백원씩 받는 빵의 하루 매상이 20여만원으로 재료비 등을 빼면 하루 12만원 가량의 이익이 남는다.

오전 10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주말도 없이 꾸준히 일한다면 6개월후 2천만원은 모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열심히 모아 단칸방일망정 흩어진 가족들과 살을 맞댈 공간을 마련하고 생업 자금도 마련해야죠. 보란듯이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 부도 여파로 이혼까지 하는 고통을 겪었던 전직 제화점 사장 강씨는 특히 '희망의 집' 입소후 교회에서 새 짝을 만나 신방을 차릴 꿈에 부풀어있다.

희망을 굽는 '계란빵 5인' 은 복지관측의 배려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십시일반 수익금을 갹출, 동료 노숙자들에게도 차례로 장비를 구입해줄 계획. 파산.허탈감.막술.울분.무력감.위험한 충동, 그리고 차가운 역 대합실 바닥…. 무인년 (戊寅年) 의 시련이여 안녕.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29일 鄭씨 가게에서 막소주와 어묵 국물로 망년회를 한 이들의 모습은 자심감에 넘쳤다.

박신홍.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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