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바뀐 남북 … 북한, 하루 종일 청와대만 쳐다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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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03면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21일 오후 숙소인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 도착, 차에서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22일 고(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특사조문단이 머물고 있는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 2000년 이후 남한을 찾는 북한 대표단의 단골 숙소로 이용된 곳이다. 내외신 취재진이 북적이고 경찰이 철통경비를 펼치는 호텔 주변 풍경은 과거와 비슷하지만, 남북 당국 간 신경전은 이전의 남북 대화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연출됐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실세 측근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대남 총책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청와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겠다고 요청해 놓고 하루 종일 답을 기다리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의 청와대 예방 요청을 신속하게 받아들였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다른 모습이다. 현정은 회장이 최근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하고 체류 일정을 다섯 차례나 연장한 것에서 보듯, 애를 태운 측은 늘 남측이었다.

북 조문단, 이 대통령 예방 결정되기까지

고려항공, 5시간 기다리다 돌아가
북한은 22일 종일 공세를 취했다.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것이라고 했고, 이를 위해 이명박 대통령 예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오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장관을 지낸 임동원·정동영·이종석 전 장관 등과의 ‘민간인과의 조찬’에서부터 시작했다. 자리에 있던 김덕룡 대통령 국민통합특보를 통해 이 말은 청와대로 전해졌다.

이후 오전 10시20분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부장이 전날 밤 막판 합의를 통해 이명박 정부 들어 최초의 고위 당국 간 면담을 한 뒤, 북 대표단의 청와대 예방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확산됐다. 두 사람이 ‘짧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1시간20여 분 동안 남북 현안 전반을 긴밀하게 논의했고, 김 부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 표명했기 때문이다. 면담에는 우리 측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실장과 북측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이 각각 배석했다. 김 부장은 정식 면담에 앞서 공개 환담에서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번 정권 들어 첫 당국 간 고위급 대화임을 생각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북남 관계가 시급히 개선돼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면담 시작 전 청와대 예방 가능성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언급했던 현 장관은 면담이 끝난 뒤 ‘북한 조문단이 일정대로 떠나느냐’는 질문에 “시간은 좀 더 늦어질 수도 있다”고 말해 김 부장의 청와대 행이 조만간 이뤄질 것이란 예측을 뒷받침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도 이날 현 장관의 면담이 시작되기 전 “조문단이 하루 더 체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 이런 관측은 힘을 얻었다.

그러나 면담 뒤 분위기는 흐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 장관으로부터 오후 1시30분부터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 부장의 청와대 예방 의사 및 면담 결과를 보고받고 신중히 논의했지만, 북측에는 “면담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소식만 전해줬다. 북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초 북한 대표단은 오후 2시 출발할 계획을 우리 측에 통보했고, 이들이 타고 갈 고려항공 전세기는 이날 오후 1시쯤 김포공항에 도착해 대기하던 중이었다.
북측 대표단이 홍양호 차관 주재로 우리 당국자들과 오찬을 마친 직후인 오후 2시40분, 호텔 주변의 폴리스라인이 다시 쳐지고 경계가 강화되면서 한때 북측 대표단이 예방을 포기한 채 북측으로 귀환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청와대, “당국대화 원칙 확인하라”
이명박 대통령은 왜 남북관계 전기가 될 북측 조문단의 청와대 예방을 선뜻 수락하지 않았을까. 이 대통령의 이날 일정은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경기도의 한 지역을 방문, ‘서민 행보’를 하기로 돼 있었으나 국장 기간임을 감안해 취소했다. 예방을 받으려면 시간은 충분했다. 청와대 예방을 쉽게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외교안보 분야 고위 관계자는 “통일부 장관의 만찬은 조문 사절을 예우하는 의전 차원, 또 남북대화의 기본 원칙을 이번 기회에 확립한다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낮 현 장관의 대통령 보고에서 만찬 내용을 본 뒤 예방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이 결정됐다”고 말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통민봉관식으로 나오면서 남남갈등을 야기하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을 초청해 억류된 현대아산 근로자 유씨를 석방하고 이산가족 행사를 통보한 데 대한 불쾌감이다. 연안호 선원 석방을 요구하는 우리 당국의 대화 제의는 무시하고, 김대중 평화센터 측을 통해 조문사절을 보내는 것을 통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전 조율 없이 만났다간 이전 정부의 10·4 합의에 대한 재정 부담을 덜컥 지게 될 것이란 계산도 신중모드의 배경이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 관계의 국면 전환을 원하고 형식에는 유연하게 대하지만 지원을 해주고도 끌려 다니는 구태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게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했다. 다른 소식통은 “앞으로 남북 대화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금도와 격조를 갖춰 하겠다는 게 청와대의 의지”라고 말했다. 국내 보수 세력의 비판을 의식한 행보란 분석도 강하다.

“다급한 건 북한” 판단
정부의 이 같은 자세의 배경에는 조문 정국을 통한 북한의 대남 공세가 남북관계의 전면적 전환이라기보다는 북미 직접 대화를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을 희석하려는 전략적 요소가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 사이의 극한 대결은 북·미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이 워싱턴의 메시지를 통해 얻은 것 같다. 그래서 핵 문제는 미국과 논의하고 남한과는 경제 교류협력을 재개해 경제적 이득만 취하려는 게 북한의 의도인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행보가 DJ식 햇볕정책에 대한 ‘공’(功)을 부각해 남북 관계를 주도하려 한다는 우려도 있다.

안보리 제재 이후 북측이 다급해졌고,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주도권이 남측에 넘어왔다는 인식도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미국이 북한의 조선광선은행 등을 추가로 제재하면서 상당히 아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계속 궁지로 몰리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가 국제사회와의 밸런스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남북관계를 일방적으로 진전시킬 수 없고 6자회담을 통한 핵문제 해결 진전 정도에 맞춰야 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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