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쏟아진 말말말]말로 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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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건국 이후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한 경제계에서도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계비행 (視界飛行)' '야생마 길들이기' '백의종군' 등이 그 것.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감을 반영하듯 '비장' 한 말이 많았던 것이 특징이다.

실업대란.구조조정 작업과 관련한 갖가지 말들도 관리와 기업인들의 입을 통해 터져나왔다.

◇ 외환위기.실업 = 이규성 (李揆成) 재정경제부장관은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을 위한 로드쇼에 다녀온 직후 "외환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은 계기비행 (計器飛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시계비행 (視界飛行) 을 해야 할 때" 라고 말했다.

김승연 (金昇淵) 한화그룹 회장도 "회사를 위해서라면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이 한몸 바치겠다" 는 말을 남겼다.

또 "빚진 자의 변명은 구차한 것이다.국제사회는 자선모임이 아니다" 라는 대한상의의 경제부활 21가지 금언이 '말말말' 난을 장식하기도 했다.

실업이 폭증하면서 한 대기업 사원은 회사가 생산직은 줄이지 않고 사무직만 감원하자 "생산직은 가족이고 사무직은 가축" 이라고 자조했으며, 감원발표가 추석 후로 연기되자 "추석이 직장수명을 연장해줬다" 고 한 직장인도 있었다.

◇ 구조조정 =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한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특유의 간접화법을 통해 수많은 말들을 양산했다.

'5대 그룹 구조조정 작업은 야생마 길들이기' '워크아웃은 칼날 같은 산등성이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 등이 그가 남긴 대표적 말들이다.

권한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견제를 받기도 했다.

박희태 (朴熺太) 한나라당 총무는 그에 대해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금통령 (金統領)' 쯤 되는 모양" 라고 꼬집었다.

이사철 (李思哲) 한나라당 의원은 은행 합병과 관련, "자식이 공부 못하면 공부 잘하는 애들과 놀게 해야지, 불량한 애들끼리 어울리게 해 봤자 무슨 효과가 있느냐" 며 부실은행일수록 우량은행과 합병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구조조정' 을 강력하게 밀어붙이자 기업 쪽에서는 적지 않은 불만이 터져나왔다.

한 대기업 임원은 "시장원리가 있다면 기업권리 또한 보장돼야 한다" 고 말했다.

LG와 현대 간의 반도체 의견조율이 난관에 부닥치자 한 대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협상을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한 현대와 LG의 야구경기 결과에 따라 결정하면 어떻겠느냐" 고 제안하기도.

◇ 기타 = 고객 돈을 빼돌려 부실계열사를 지원한 거평그룹 나승렬 (羅承烈) 회장은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어디까지가 고객돈이고 어디까지가 회사돈인지 몰라서 그랬다" 고 답변, 주위를 어이없게 했다.

기아사태로 법정에 선 김선홍 (金善弘) 전 기아그룹 회장이 법정에서 남긴 말도 압권. 최후진술을 통해 "기아 차는 모두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운 차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경영자만 만들 수 있다" 고 했다.

그러나 기아그룹에 대한 감리 결과 기아.아시아자동차가 7년에 걸쳐 무려 4조5천억원을 분식해온 것으로 드러나 아름다운 말 (?) 을 무색케 만들었다.

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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