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신문이 주는 의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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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미술가는 신문에 대해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 신문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엘리트인줄 알았는데 거의 색맹 (色盲) 이 아닌가. 원색 (原色) 을 남용한 신문들의 컬러인쇄가 우리국민의 색채감각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 왜 조금은 생각을 안해주는가.

- 실상 우리나라 신문은 외국신문에 비해 컬러인쇄를 많이 한다.

꼭 무당 치맛자락처럼 요란하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한 미술가의 불만과 의문은 지극히 소박한 것이다.

신문은 그보다 더 큰 의문들을 지니고 있다.

큰 의문중의 하나는 권력과의 관계고 두번째는 기업으로서의 신문이다.

신문은 애당초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태어났다.

아무리 신문형태를 갖추고 정보를 많이 담아도 관보 (官報) 를 신문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신문과 권력은 항상 긴장관계에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한다.

"신문이 할 말을 제대로 안하고 있는 것 같다" 는 의문이 제기된다면 신문에 대한 신뢰는 이미 상처를 입은 것이다.

또 권력이 언론을 잘 장악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인식된다면 그 권력은 이미 병이 든 것이다.

신문이 권력에 대해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신문이 정치 그 자체를 한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언론은 제4부 (第4府) 다' 라는 말은 언론의 권력감시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지 제4의 권력기관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거대한 권력기구인 듯 비춰지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언론이 겸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을 과시하고, 정치와 힘의 게임을 벌이려 하기 때문에 언론은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정보를 무기로 삼아 군림하는 패권주의로 보이는 것이다.

신문이 권력에 비굴하다는 의심을 받거나 그 반대로 신문이 권력 그 자체인 듯 오만하다면 신문은 이미 독자의 마음에서 떠나 있다고 봐야 한다.

신문이 기업으로서 어떻게 존립하는가를 들여다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외환위기가 아니더라도 신문기업의 존립은 신비에 가깝다.

우선 신문값에서 그렇다.

한달 구독료 9천원, 하루에 3백여원 꼴이다.

종이값만 해도 하루에 2백원쯤 된다.

배달료를 포함한 막대한 판매비용을 계산한다면 지면을 채운 그 많은 정보는 값이 전혀 없는 셈이다.

신문은 너무 저가품 (低價品) 으로 덤핑을 하고 있다.

정부는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이유로 신문값 인상을 용인하지 않고, 신문사들은 독자감소를 겁내 구독료 인상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한때 30만~40만부 이상을 발행하지 않겠다고 고집했었다.

고급신문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 신문은 읽어서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읽지 않아도 좋다는 배짱이었다.

판매정책뿐 아니라 편집정책에서도 고급신문만 지향하다 결국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정책을 모두 바꾸었지만 우리나라 신문은 르몽드의 정반대에서 출발한다.

읽어주지 않아도 좋은 신문, 많이 팔리기만 해서 부수가 많고 그래서 광고수입만 올릴 수 있으면 되는 그런 신문이다.

거품부수와 광고확보를 위해 신문 스스로를 저가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값이 얼마나 싸구려인지는 외국신문과 비교해보면 명백하다.

미국의 유력지는 한달 구독료가 30달러 (약 3만9천원) 안팎이다.

일본의 아사히 (朝日) 신문은 3천8백엔, 닛케이 (日經) 는 4천2백엔 (약 4만원) 이다.

우리나라 신문이 경영이 좋아 독자에게 싼 값으로 신문을 공급하는 것도 아니다.

서울의 10개 종합지 신문사 차입금 총액은 3조원이 넘는다.

부채비율이 5백%를 넘는 신문, 자본잠식이 된 신문, 부채가 연간 총매출액보다 많은 신문이 허다하다.

그래도 신문사들은 건재하니 신비로운 일이다.

신문들이 경영개선을 위해 모두 몸부림치고는 있다.

인원감축, 분사 (分社) 를 통한 구조조정, 급여감축 등의 노력을 하고 있으나 다른 사업처럼 합병이나 빅딜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권력의 힘을 입어 차입금을 늘려 버티는 것은 악순환이다.

그래서 신문의 제값받기를 포함한 경영의 투명성이 신문사가 안고 있는 당면과제다.

신문의 개혁론이 신문사 안팎에서 사뭇 활발하다.

신문 스스로의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부의 힘이 작용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의 힘이 언론에 부당하게 가해진 악몽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외부의 힘에 의한 변화가 언론의 발전이나 언론의 민주화를 가져온 예는 세계에 없다.

신문권 외에서의 개혁론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신문은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신문이 안고 있는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벗어나가야 한다.

김동익 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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