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초석 다진 큰 별 우리 사회의 어른이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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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시민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전광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TV를 쳐다보는 100여 명의 시민은 한결같이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이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한 할머니가 떨리는 듯 두 손을 꼭 쥐었고, 또 다른 중년 남성은 가슴을 한 번 치더니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서울역 대합실의 시계는 멈춘 듯했다.

◆“민주화 큰 별이…”=많은 시민은 김 전 대통령을 영원한 민주화 투사로 기억했다. “1980년대 민주화를 이끌어낸 그분의 정신이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주부 권성희(52·서울 신내동)씨는 “서너 해는 더 사시면서 국민들에게 힘을 주셨으면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민들은 남북 관계에 진전을 이끈 김 전 대통령의 빈자리를 아쉬워했다. 대학생 김지현(21·부산시 용호동)씨는 “최근 흔들리는 남북 관계를 볼 때마다 그분의 업적이 얼마나 컸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이제 누가 또 김 전 대통령처럼 남북 문제에 발벗고 나설지 걱정된다”며 슬퍼했다.

학원강사 유현영(31·여)씨는 “김 전 대통령님의 서거를 계기로 고인의 햇볕정책 중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 잘 계승했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전직 대통령이 잇따라 서거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시민들이 많았다. 주부 성현주(41)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데 대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신 것 같다”며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도,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떠나시니 마음이 허전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서울 동교동 주민들은 “국가의 큰 어른이 돌아가셨다”며 슬픔에 잠겼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동교동 주민은 “퇴임 전 주민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도 베풀어 주셨는데… 동교동의 큰 별이 떨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81년 1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수감됐던 청주교도소에서 당시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강복기(67·충북 청주시)씨는 서거 소식을 접한 뒤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매년 연하장이 왔었다”며 “당장이라도 찾아가 울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일반 수용자보다 훨씬 강한 통제를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시민단체·네티즌도 묵념=이날 오후 시민단체들은 진보·보수를 가릴 것 없이 긴급 논평을 내고 깊은 애도를 표했다.

단체들은 “한반도 평화와 민주화에 대한 헌신으로 국제사회도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이었다”(참여연대), “민주화에 공로가 큰 거목이 돌아가셔서 애석하고 안타깝다”(경제정의실천연합),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분이다”(뉴라이트전국연합)라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인터넷에선 매 시간 수만 명의 네티즌이 추모글을 올렸다. 다음 아이디 whwlsgml은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신 분이라 보내기 아쉽다’고, 네이버 아이디 hisrain은 ‘우리 사회가 가진 몇 안 되는 어른을 잃게 돼 슬프다’고 적었다. 일부 네티즌은 지역 감정을 들먹이며 원색적인 비난 댓글을 달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장주영·이현택 기자, 김태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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