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스크린 쿼터제-유지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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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미투자협상에서 스크린 쿼터 (한국영화 의무상영) 의 폐지 내지 축소가 거론되는 것과 관련해 국내영화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현행 1백46일에서 단 하루도 양보 못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폐지론에 동조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양측의 팽팽한 주장을 듣는다.

우리는 극장에서 상영되기 이전의 영화를 '영화' 라고 부르지 않고 '필름' 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스크린쿼터 폐지론자들은 시장원리에 의한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극장을 뺀 '필름' 의 경쟁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전세계 극장의 대부분이 미국영화의 배급망에 독점되고 만 불공정성에 대해선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체 한다.

이것이 그들의 첫번째 과오다.

현대 시장에서 영화만큼 '독점' 이 문제가 되는 상품은 없다.

미국영화의 압도적인 자본과 기술력.인력 때문이지만 한편으론 무한복제가 가능한 영화상품의 속성 때문이다.

세계 영화시장의 80% 이상을 미국영화가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수입허가제를 채택한 중국과 인도 같은 거대시장을 빼면, 전세계 대부분의 극장들이 1년 열두달 미국영화만 상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나라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이 독점구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쿼터 폐지론자들은 지금까지 지켜온 '독점방지제도' 를 없앨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이 두번째 과오다.

폐지론자들은 쿼터를 없애는 대신 자금지원을 하거나 제작여건을 도와주는 것이 한국영화를 위해 더 낫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호주는 3천억 이상을 쏟아부어 1년에 30편 정도의 '필름' 이 제작되도록 했지만 그중 서너편이 아주 작은 극장에 걸린다.

극장이 독점당한 뒤에는 어떤 지원책도 사후약방문 (死後藥方文) 이 된다는 세계적 현실에 대해 무지한 것. 이것이 그들의 세번째 과오다.

영화는 더 이상 오락이 아니다.

비디오.음반.방송망을 통해 확장되는 복합 영상산업의 핵심이며 미래 이미지산업의 중추다.

미국이 그토록 집요하게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프랑스가 영화인들뿐만 아니라 언론과 지식인.문화예술인.대통령까지 일치단결해 그토록 '문화적 예외조항' 을 고집하며 저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장의 불확실한 투자유치를 미끼로 미래의 황금밭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에 통상관료들이 쉽게 동조한다.

네번째의 중대한 과오다.

폐지론자들은 한국영화가 '온실 속에서 보호받는 약한 나무' 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검열과 규제의 대상이었지, 한번도 보호받은 적이 없다.

스크린쿼터도 최근 4년 동안에야 어느 정도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4년간 한국영화는 관객점유율을 25%까지 끌어올렸고, 그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유일한 국가다.

그런데 페지론자들은 이 활력에 찬물을 끼얹는다.

다섯번째 과오다.

폐지론자들은 스스로를 폐지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당장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축소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축소는 곧 실질적 폐지로 이어진다.

배급이 힘들어지면 제작편수는 급감하고 결국 쿼터를 지킬 제작편수마저 부족해진다.

'폐지' 를 명기하지 않으면 폐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진함 또는 위선. 이것이 그들의 여섯번째 과오다.

이창동(영화감독.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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