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AMF 왜 꺼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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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물주든 슈퍼맨이든 대기권에서 서치라이트로 지구를 자세히 살피는 존재가 있다고 하자. 아시아지역 수뇌들이 부지런히 상대를 바꿔 가면서 만나는 모습이 그의 시선을 끌 것이다.

이름하여 수뇌들의 교차회담이다.

지난 5개월 사이에 한.미.중.일 및 러시아의 대통령과 총리들은 교차회담을 한 순배 마치고 오직 한.러 정상회담만 내년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러고도 못 다한 얘기가 있는지 클린턴과 옐친을 제외한 아시아정상들끼리 이달 중순 하노이에서 아세안 (ASEAN) 회의 참석을 빙자하고 또 한 차례 만난다.

아시아의 수뇌들은 무슨 일을 꾸미는가.

두 나라의 지도자들에게는 1차적으로 두 나라만의 당면문제가 있다.

한.일간에는 과거사, 어업협정, 일본이 한국의 금융위기를 지원하는 것 같은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다른 쌍쌍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키워드는 전략적 파트너 관계다.

쌍쌍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벽돌처럼 쌓이면 21세기 아시아의 새 질서라는 큰 집이 된다.

아시아의 새 질서는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에 이어 세계 제3의 파워센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21세기에는 아시아사람들이 16세기 이래 실로 5백년 만에 아시아 역사의 주역자리를 되찾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수뇌들은 그들이 그런 역사적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헤겔의 생각대로 그들은 모든 세계사의 주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를 주관하는 '세계정신' 의 하수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아시아가 갖춘 파워센터의 조건을 보자. 2050년까지 아시아인구는 57억명이 되고, 미국과 유럽인구는 둘을 합해도 세계인구의 10%에 머문다.

미국과 유럽은 지난 5백년 같이 인류의 나머지 90%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가.

90년대말 동아시아의 국내총생산 (GDP) 은 미국과 유럽을 합친 것의 절반이지만 2025년에는 아시아의 GDP가 유럽과 미국의 두 배로 역전될 전망이다.

생산을 두 배로 늘리는 데 걸린 시간도 영국은 1780년부터 58년, 미국은 1839년부터 47년, 일본은 1880년부터 37년, 인도네시아 17년, 한국 11년, 중국 10년이다.

이런 통계숫자에 나타나지 않는 근본적 변화가 있다.

아시아인들이 긍지와 자신감을 되찾은 의식혁명이다.

강대국의 잠재력을 가진 일본과 중국이 모두 아시아에 있고, 인도 역시 21세기 후반에는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빅 파워에 든다.

구미학자들이 아시아 경제위기를 보고 아시아적 가치를 공격하고 아시아 몰락을 예언하는 데는 아시아 경계심리가 작용한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김종필 (金鍾泌) 총리가 일본에서 아시아통화기금 (AMF) 창설에 찬성하는 발언을 한 데 대해 국내반응이 대체로 차가운 것은 유감이다.

아시아사람들은 21세기의 아시아가 당면할 도전을 놓고 모든 상상력을 동원한 백화제방 (百花齊放) 식의 논의를 해야 하는 입장이다.

AMF는 시기적절한 화두 (話頭) 의 하나일 수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아시아국가들에 두 가지 과제를 안겼다.

하나는 위기를 해결하는 일이요, 둘은 위기재발을 예방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아시아경제가 미국의 이해에 휘둘리는 정도를 줄이는 일이다.

미국이 반대하는 AMF의 창설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것과 불가능한 것은 다르다.

우리가 언제부터 미국 좋아하는 일만 했던가.

미국은 처음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에도 반대하다 적극 참여로 돌아섰다.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청와대와 정부의 직접당사자들은 한 발 물러서 있고, 중국의 입장을 저울질하면서, 아시아가 아시아문제의 해결을 주도하는 21세기체제의 하나로 AMF 구상은 계속 논의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고도의 정치다.

다만 AMF 지지와 일본 리더론을 한 줄에 꿴 것은 金총리의 전술적인 실수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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