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본다고 싫증내지 말고, 거슬린다고 울컥 화내지 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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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호 08면

마음의 병은 “사물을 강탐(强探)하고, 마음을 조장(助長)하는 데서” 생긴다. 이 오래된 고질을 고쳐야 평탄한 길이 보일 것이다. “어떻게?”라고 묻는 남언경에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 주었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퇴계, 그 은둔의 유학<7>-남언경에게 보내는 충고

잊지도 말고 붙잡지도 마라
“치료법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일체의 영욕과 명예, 세상의 관심과 시선을 몽땅 마음 밖으로 물리치십시오. 이게 되면 문제의 절반 이상이 해결됩니다. 평상시 수작을 줄이고, 욕망도 내려놓고, 허허로운 마음으로 여유 있게 지내십시오. 때로 책과 화초를 감상하고, 시내와 물고기와 벗하십시오. 늘 보는 것이라 해서 싫증 내지 마시고요. 늘 마음을 편하고 긍정적으로 가져, 거슬린다고 울컥 화를 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게 비결입니다.

책도 많이 읽으려 하지 말고 적절히 음미하는 데 그치십시오. 사물의 원리는 일상적이고 단순한 데에서 드러납니다. 그곳을 떠나지 마시고, 헤엄치듯 노니십시오. ‘억지로 붙잡으려 용쓰지도 말고, 그렇다고 주의의 끈을 놓아버리지도 않으면서, 다만 사물을 의식의 혼란과 침몰 없이 바라보는 데 주력하십시오(惟非著意非不著, 照管勿忘)’. 그 훈련이 오래 쌓이면, 어느 날 자신이 덜컹 변하는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하루아침에 이 경지를 얻겠다고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속박하지는 제발 마십시오.”

퇴계는 지금 은둔자답게, 바깥의 관심을 일체 끊으라고 권한다. 세속적 기대는 물론, 명예와 평판까지 접고, 오직 자신 속으로 침잠하라고 말한다. 바깥을 끊으면 세상과 거스를 일이 없어진다. 심기(心氣)가 화평해질 때, 사물과 풍경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를 주자학은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부른다.

퇴계가 18세 때 지은 시가 남아 있다. “이슬 머금은 풀 물가를 둘렀는데/연못은 맑고 싱싱해 모래 한 점 없구나/구름 날고 새 지나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때때로 제비가 물을 찰까 두렵다(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時時燕蹴波).” 여기 연못은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제비가 차는 물은 이를테면 ‘일체의 영욕, 명예, 세속적 관심과 시선’을 총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퇴계의 이 시는 그가 추구할 일생의 과제를 예시하고 있다. 그가 도산에 은둔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지나는 연못처럼
마음이 고요하면 사물들은 다만 ‘마음을 잠깐 물들였다가’ 그대로 지나간다. 연못에 비친 새와 구름처럼…. 물이 마음을 장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사물의 앞을 막아서도 안 되고, 그 뒤를 쫓아서도 안 된다. 이 ‘거리’ 혹은 ‘담담함’이 주자학이 노린 마음 공부의 지점이다. 혹 도산서당을 들르실 때, 입구 채 못 가서 있는 표지판의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를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연못에 담긴 하늘빛, 그것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는 잠깐 연못에 자신을 담갔다가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퇴계선생언행록』의 일화 하나. “일찍이 (선생님을) 산당(山堂)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마침 집 앞으로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하던 중이 ‘그 사람 이상하네, 선생님 앞을 지나가면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다니’ 하자, 퇴계가 말했다. ‘말을 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 같다. 좋은 풍경 하나를 보탰을 뿐인데,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깨달음이 아닌 오랜 상승의 노력을
이 경지는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점진적 훈련의 결과 얻은 축적의 힘이지,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퇴계의 충고는 이어진다.“깨달음(悟)을 역설하시던데, 이것은 인도 쪽에서 내려온 돈초가(頓超家)의 법도이지 우리 유학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입니다. 그럴 경우 앞서 말한 강탐(强探) 조장(助長)의 병을 여전히 못 면할 듯합니다.

저 자신이 이 병에 직접 걸려 보았기에 잘 알며, 그래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滉於此病, 身親<8AF3>悉, 言之無疑). 치유와 보양을 통해 아직 효과까지 체험하지는 못했기에, 말하기 외람되나 동병상련(同病相愛)의 마음으로, 같은 어려움을 더불어 헤쳐 나가는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원찮다고 말까지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퇴계는 이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절구 하나를 덧붙였다. 그 시는 『퇴계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자성록』에만 있다. 너무 충고 조여서 혐의를 피하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또 다른 고풍시(古風詩)가 후배 남언경을 동급의 수도자로 대접하고 있는 것이 후인들에 눈에 마뜩잖았던 탓일까.

“(유교의) 성인은 상달(上達)을 말했지, 깨달음(悟)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효과는 차근차근 오래 쌓아 가는 거기 있을 뿐! (노장의) 무위(無爲)가 궤도를 벗어났다 해놓고, 어째 자신의 해법은 선(禪)의 공(空)에 떨어지시는가(聖言上達不言悟 攻在循循積久中. 旣說無爲便脫誤, 如何自說落禪空).”

퇴계는 노장의 무위도, 불교의 돈오도 물리쳤다. 퇴계는 자신의 글 곳곳에서 ‘진적역구(眞積力久)’를 강조했다. 마음과 몸은 오랜 ‘훈련’을 통해서 기량이 나아질 때, 그와 더불어 심신이 자유를 얻고 기쁨의 폭이 더욱 깊어져 갈 것이다. 길은 “심(心)이 이(理)를 향해 가는 긴 도정이다. 『성학십도』의 차자(箚子) 말미에서 퇴계는 선조를 이렇게 격려했다.

“절대로 공부에 따른 강박과 불편에 좌절(自沮)하지 마시고, 더 큰 믿음과 분발로 진리의 속을 쌓아 나가(積眞之多), 오랫동안 힘쓰시면(用力之久), 자연히 마음(心)과 이(理)가 서로 만나다가 어느 날 문득, 융회관통(融會貫通)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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