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중도실용 ‘국가 정체’ 돌파할 희망의 언어 되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7호 02면

한국에서 중도는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편이었다. 건국 자체가 자유주의냐, 공산주의냐를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둘 중 자유주의를 단호하게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중도는 희생되기 일쑤였다.

결정적인 건 300만 명이 죽은 6·25전쟁이었다. 희생자 가족의 마음속에 지우기 어려운 증오심이 남았다. 이런 체험이 한국인에게 흑 아니면 백, 상처받는 중도보다 선명한 이념을 선택해야 한다는, 유난히 강박적인 태도를 키웠는지 모른다.

그런 점을 이해한다 해도 유난히 강박적인 태도가 해방 64년, 건국 61년이 된 2009년 한국 사회에 지배적인 성향으로 자리 잡아선 곤란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제6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중도실용의 길’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성향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도실용의 길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추구했던 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과정부터 김종필·박태준 전 총리와 손을 잡았다. 이른바 공동정권이었다.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통합을 지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보수세력의 도움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산업화 인맥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야당의 이해 속에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성공시켰다. 이 대통령의 경축사에 들어 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는 1998년 김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란 표현으로 정식화한 내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민노당·민주노총 같은 친북 좌파 세력으로부터 기회주의·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의 주요 업적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과 이라크 파병은 이른바 진보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얻어낸 중도실용 정책이었다.

중도실용은 경쟁적인 가치들에서 공통의 이익을 이끌어 내는 자세다. 이 대통령은 “환경이 경제를 살리고, 경제가 환경을 살리는 녹색성장이 가장 전형적인 중도실용의 가치”라고 예를 들었다. 환경가치와 경제가치는 더 이상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를 죽여야 하는 적대적 경쟁관계가 아니다. 자유와 평등, 산업화와 민주화, 성장과 복지, 민족과 세계 같은 가치들에서도 공통의 이익을 끌어낼 수 있다. 공통의 이익을 찾다 보면 적대적 경쟁은 상대방을 살리는 보완적 경쟁으로 전환될 것이다.

중도실용이란 표현법은 이 대통령이 사용했지만 중도실용적 접근법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 모두에게서 찾아낼 수 있다. 그들이 중도실용적 자세를 취했을 때 나라와 국민은 편안했다. 그들이 하나의 가치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했을 때 사회는 불안에 휩싸이곤 했다. 중도실용은 특정한 노선이기보다 하나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좌우이념과 노사, 지역과 여야의 적대적 경쟁 속에 장기 정체 상태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중도실용이 정체 상태를 돌파할 희망의 언어, 공통이익을 도출하는 언어가 되길 바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