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리포트]山門이 저잣거리 같아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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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평상심이 곧 도 (道) 다.

불교 선종 (禪宗) 의 역대 조사스님들은 밤이 오면 잠을 자고, 선거날이 되면 투표를 하는 등 삶을 이끄는 규범들을 따라 변함 없는 순리적인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게 선리 (禪理) 의 핵심이고 불법진리라고 누누이 역설했다.

그러나 선종인 한국 불교 조계종단은 총무원장 선출을 둘러싼 갈등끝에 급기야는 평상심을 일탈하는 '헌정중단 (憲政中斷) 사태' 를 빚고 말았다.

조계종 제29대 총무원장 후보인 월주 (月珠) 현총무원장과 월탄 (月誕) 전법주사 주지는 각각 '종헌.종법 수호' 와 '3선 반대' 라는 명분 아래 힘겨루기를 해왔다.

두 사람의 종권경쟁이 팽팽한 호각지세를 치달으면서 선거 전야인 11일 월탄스님측이 종권의 상징인 서울 조계사내 총무원 청사를 점거, '정화개혁회의' 라는 비상체제를 선언했다.

일체의 종무행정 집행기능이 정지되고 평상심이 깨지는 파국의 굉음이 울렸다.

원인과 경위가 어떠하든 간에 30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폭력사태까지 발생한 현실은 지극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거 예정일인 12일 월하 (月下) 종정의 기자회견, 선관위의 선거실시 강행 결의, 본사주지회의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그러나 결과는 선거가 무기 연기됐고 사태는 결코 수습되지 못한 채 자칫 종단이 두동강날 위기의 심연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만 했다.

우선 사태의 원인과 배경을 크게 두가지로 압축하면 3선 법리논쟁과 월하종정 - 월주총무원장간의 갈등으로 요약된다.

이번 총무원장 선거의 핫이슈인 3선 법리논쟁은 80년에 6개월동안 했고 오는 20일로 임기가 끝나는 제28대 원장을 한 월주스님의 출마가 1차 중임만 허용한 현행 종헌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월주스님측은 현 종헌이 94년 개정된 것이고 80년에는 10.27법난으로 임기도 채우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3선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이러한 뜨거운 감자인 첨예한 쟁점을 공개적으로 여법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르려는 데서부터 발생했다.

종단에 세속 헌법재판소격인 법규위원회가 있고 종회의원과 선거인단이 선출한 총무원장을 인준하는 권한을 가진 원로회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된 3선 법리논쟁에 대해 명확한 유권해석을 내리지 않았다.

선거에 앞서 선행돼야 할 3선 법리논쟁의 가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줄서기에 익숙한 '해바라기성향' 과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 후보를 달리하는 소승적인 선거풍토 때문이었다.

양측 모두가 3선 법리논쟁을 세속 법조인들에게나 자문해 자기측에 유리한 해석만 앞세운 작법 (作法) 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세속법보다 한참 높은 차원의 출세간법 (佛法) 을 따라 살겠다고 출가한 승려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세속법에 의지해 판단하려는 태도는 본말이 전도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속법이 풀지 못하는 문제도 단숨에 해결하는 게 불법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세속은 승려를 인생의 스승으로 받든다.

종책 (宗策) 수립 및 종무행정 집행을 둘러싼 월하종정과 월주총무원장간의 갈등은 오래전부터 심화돼 왔다.

월탄스님측은 선거를 계기로 이같은 갈등의 틈새에서 월주원장의 3선을 반대하는 월하종정의 교시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월하종정의 교시는 기름에 불을 댕기는 폭발성을 발휘하면서 총무원장 선거의 한 축을 이루어 왔다.

12일 현재로는 월하종정이 친히 상경, 월탄후보측의 비상체제를 공식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대세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시 12일 열린 본사주지회의도 종정교시를 받들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는 아니지만 폭넓게 개진돼 월탄스님측을 측면 지원했다.

본사주지회의는 공식 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교구별 종회의원과 선거인단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과 선거의 최대 변수임을 감안할 때 본사주지들의 향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총무원 점거와 함께 선언된 월탄스님측의 비상체제는 불가의 전통적 중의 (衆議) 수렴방법인 산중공사 (山中公事) 를 원용한 승려대회 형식을 빌려온 것이다.

한편 3선 법리논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월주스님측과 종단의 관련 기구들도 오늘의 사태를 현명하게 수습할 과제를 안고 있다.

사태수습의 대안으로 다음 두가지를 상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원로.종회의원.본사주지 연석회의를 열어 3선 법리논쟁을 정리하고 총무원장 임기 만료일인 20일 이전 다시 선거일을 정해 원장을 선출하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 대안은 여법한 전국 승려대회를 열어 대중공사 (大衆公事) 로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방법이다.

원래 승려대회는 종헌.종법에 우선하는 초법적인 정통성 (正統性) 을 가져왔기 때문에 파국을 막는 비상수단이 될 수 있다.

이제 조계종 사태는 누가 흑 (黑) 이고, 누가 백 (白) 이냐를 떠나 종단이 두토막나는 파국을 막는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앞날이 캄캄해진다.

이은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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