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박정희·김대중과 공직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고 (故)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92년 12월 16일 대선을 이틀 앞둔 저녁이었다.

당시 후보였던 金씨는 "하나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이제는 과거를 묻고 그분의 공적만을 생각하겠다" 고 토로했다.

보수안정층의 표를 하나라도 더 얻겠다는 뜻도 담긴 소회 (所懷) 였지만, 그후 6년간 朴대통령에 관한 그의 발언을 보면 역시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

두 사람의 정치역정은 피해와 가해의 대칭점에 있다.

그런 속에서 흥미롭게도 그들은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슷한 대목이 있다.

위인들의 경세 (經世) 와 애민 (愛民) 의 철학.자세를 배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이 자신을 기독교적 선지자처럼 여기며 국정을 꾸려가던 자세와는 다르다.

94년 성수대교 붕괴때 그는 "단군 이래 한국은 썩었다" 고 말해 "조상의 청빈정신마저 외면하려 한다" 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이순신 (李舜臣) 장군을 그 시대가 추구해야 할 덕목으로 내놓았다.

金대통령 역시 "완전한 인간의 정점으로 이순신을 알아야 한다" 고 주변에 가르쳐 왔다.

율곡 이이 (李珥) 의 사당을 새로 지으면서 朴대통령은 개혁정신에 주목했다.

金대통령도 "기 (氣) 중심의 율곡 철학은 필연적으로 강한 개혁의 경향을 띤다" 고 평가했다.

우리 정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바람 정서' 를 중시, "개혁을 위해서는 국민운동이 필요하다" 고 생각한 점도 같다.

하지만 국가경영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방식은 판이하다.

金대통령의 제2건국운동은 '선 (先) 경제발전.후 (後) 정치' 를 내세운 박정희 모델을 극복하는데 있다.

변증법적 지양 (止揚) 이라고도 할 수 있다.

DJ의 핵심참모인 한상진 (韓相震) 서울대 교수는 제2건국운동을 "朴대통령을 향한 정치적 도전장" 으로 규정한다.

金대통령이 17일 참석할 콸라룸푸르 아태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의 회원국들은 대부분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본뜨거나 응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자리는 金대통령이 '민주화와 경제의 병행발전' 이라는 새로운 아시아적 가치창출 모델을 과시할 기회이기도 하다.

金대통령은 이같은 역사도전을 위해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의 참모들은 '개혁은 먼저 관료와의 싸움' (李 산업연구원장) 임을 강조한다.

공직사회를 바꿔놓지 않고선 제2건국의 재도약이 어려우며, 과거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한국 건설을 외친 YS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무엇보다 관료조직과 생리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었다.

청와대에 앉아 칼국수를 먹는 깨끗한 윗물이 되면 공직의 아랫물이 저절로 맑아질줄 믿었다.

대형사고 때마다 그는 "내가 그만큼 조심하라고 했는데…" 라며 각성을 촉구하다가 결국은 공직사회를 부패집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임기말까지 사정을 내걸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민생현장의 대다수 공직자들은 일손을 놓고 버텼다.

대통령은 '통치권' 으로 닦달했지만, 공직자들은 엎드린 채 '규제권한' 으로 국민들을 골탕먹였다.

교묘한 '준법투쟁' 이었다.

그러면서 '마구잡이 사정으로 민생현장이 피해를 본다' 는 여론을 일으켜 거꾸로 청와대를 압박했다.

정치9단도 공직사회의 눈치9단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YS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현정권은 공직사회의 대수술을 입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규제개혁도 50% 철폐 목표치에 맞추기 위해 이미 사문화한 규정이나 통상협정에 따른 자연적 폐지 내용도 일부 집어넣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개혁은 공직자들이 내놓기 싫어하는 권한을 과감히 없애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알맹이가 있고, 국민들이 거추장스러운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할 수 있다.

공직사회 내부에 개혁의 열성적 전위대를 만드는 노력도 부족하다.

시범적으로 몇개 부처를 잡아 키울 사람과 퇴출시킬 사람을 나누는 분리인사가 필요하다.

그래야 자정 (自淨)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고, 일선 공직자들을 개혁의 손발로 만들 수 있다.

수출제일주의로 우리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는데 앞장섰던 70년대 모범공무원의 2000년대판도 그래야만 나올 수 있다.

박정희식 모델의 극복을 통한 국가 재도약이라는 현정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공직사회의 전략적 장악이 필수적인 것이다.

박보균 정치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