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한지'…한솔문화재단 전통한지 복원성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60년대 이맘때라면 틀림없이 집집마다 월동준비로 바빴을 것이다.

창호지를 바르고 문풍지를 새로 다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창호지에 은은히 비치는 여명 (黎明) 은 알유리를 뚫는 빛과는 맛이 같을 수가 없다.

이제는 전설이 돼버린 그런 동창 (東窓) 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유리에 밀려나면서 자취를 감추다시피했던 한지 (韓紙)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 91년 전통한지 복원에 나섰던 한솔문화재단 (대표이사 구형우) 이 결실을 내놓고 있는 것. 신라시대 백추지 등 20여종이 재현되었고, 따스하고 포근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한지로 제작된 99년도 캘린더까지 선보였다.

한지 특유의 질감과 색이 현대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는지 캘린더의 경우 발행 1개월만에 4천부나 팔려 전통한지의 가능성을 확인시켰다.

우리 것의 중요성이 더 없이 강조되는 마당에 전통한지가 정말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정부도 각종 상장이나 임명장, 신임장 등을 전통한지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중이어서 기대를 갖게 한다.

화가나 서예가, 더 나아가서 박물관 등 문화관계 기관에서라도 한지사랑을 실천하면 전통한지의 복귀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듯하다.

많은 화가들이 일본의 화지와 중국의 선지 대신를 전통한지로 바꿀 것을 고려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솔문화재단 한지의 경우 '족보' 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는 전통한지의 생명력은 자그마치 1천5백여년. 각종 화공약품이 들어가는 양지 (洋紙) 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에 복원한 한지 중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백추지가 단연 으뜸이다.

1천년이란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불국사의 무구정광다라니경 (국보제126호).호암미술관의 대방광불화엄경 (국보196호).화엄사다라니경 등이 바로 백추지를 사용했던 문화재들이다.

우리 원료와 순전히 손으로만 뜨는 전통한지는 대단한 정성을 쏟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원료는 벼 (고정지)에서 뽕 (상지) , 버드나무순까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닥나무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통한다.

잘라낸 닥나무에서 벗겨낸 껍질을 '핏닥' 이라고 부르고 여기서 또다시 겉부분을 벗겨낸 것을 '백닥' 이라 한다.

이 백닥을 이틀정도 물에 불린 뒤 물과 양잿물을 혼합한 솥에 집어넣고 두세시간 삶는다.

잿물은 불필요한 물질을 녹이는 역할을 한다.

이를 다시 물에 2~3일 푹 담그고 햇볕에 고르게 쪼이면 하얗게 된다.

다음은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고 힘든 공정인 티고르기가 이어진다.

한 사람이 하루종일 골라내는 티꺼리가 1㎏ 을 넘기 어려울만큼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이것을 잘 두들겨 종이뜨는 지통에 넣고 닥풀즙을 더해가면서 막대기로 잘 풀어서 종이뜨는 발로 종이를 한장 한장 떠낸다.

닥섬유에다가 운모가루를 섞으면 운모지 (雲母紙) , 이끼를 넣으면 태지 (苔紙)가 된다.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들 한지로 서적.명함.고급포장지를 제작하면 품격이 확연히 달라 보인다.

풍류가 있는 품위를 한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명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