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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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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올 11월이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이 된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대결은 일시적으로 중단됐을 뿐이다. 그루지야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된 지금, 해묵은 분열은 또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냉전 종식을 선언한 지 오래됐지만 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철수할 당시만 해도 옛 소련은 그 자리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세력을 확장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나로 통합된 자유로운 유럽을 꿈꾸었을 뿐이다. 미국과 독일 지도자들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게 나토의 동진(東進)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공산주의 체제를 종식하면서 러시아인은 스스로 승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서구는 점점 냉전의 승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잠재적 군사 위협이 사라진 만큼 나토의 세력 확장이 군사적 목적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정학적 논리를 내세웠다. 과거 소련 연방 소속 국가들과 중·동부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서유럽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토에 새로 가입한 초창기 회원국들은 민주주의와 군사적 측면에서 일정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기준은 흐지부지됐다. 가장 후진적이고 부패한 국가들에도 문호가 개방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행한 작전에서 볼 수 있듯이 나토는 공산 세력에 대항하는 방어 동맹에서 공격적 성격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나토가 러시아 국경 지대로 세력을 넓히고, 일부 회원국이 나토 내부의 반(反)러시아 정서를 자극하면서 많은 러시아인은 나토를 전보다 더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다. 나토의 확대는 유럽이 여전히 냉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떤 평화조약도 냉전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와 군사적 대립은 아니더라도 러시아와 미국 및 유럽 국가들 사이의 새로운 단절이 냉전을 대치하고 있다.

나는 글로벌 경제위기와 버락 오바마의 집권이 이런 사태에 변화를 가져다 주길 희망하고 있다. 러시아와 미국·유럽은 역사적 퇴보를 막을 수 있는 새로운 평화조약이나 더 나은 합의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 나토와 유럽연합(EU) 등이 서명한 범유럽 차원의 새로운 공동 안보조약이 필요하다. 과거 소련과 유고연방의 해체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더 이상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세기 대결의 유산을 극복한다면 군사 정책의 조정을 통해 러시아와 미국의 핵무기 감축은 가능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위기 상황은 물론이고,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문제에서도 러시아와 미국의 협력 기반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러시아와 EU는 에너지 분야를 비롯해 비자 면제 등 인적 교류 분야에서도 공통의 관심사에 기초해 연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세계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문제에서도 협력해야 한다. 하지만 냉전적 대결이 해소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들이다.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어서 종식시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베르사유조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2019년께면 마침내 20세기와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러시아 외교국방정책위원장
정리=하현옥 기자 ⓒ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