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간부, 중국 기자들과 고구려사 놓고 설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 3일 낮 12시30분쯤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부근의 한정식집. 연례 한.중 기자교류행사 참석차 방한한 환구시보(環球時報).베이징청년보(北京靑年報) 등 중국 주요 언론사 기자 7명이 박준우 외교통상부 아태국장 등 외교부 당국자들과 마주앉았다.

궁젠중(建忠)중국 외교부 신문사(한국의 외교부 대변인실) 부사장 등 중국 외교부 간부 3명과 리루이펑(李瑞峰) 주한 중국대사관 대변인도 자리를 함께했다. 당초 간단한 환영식 정도로 여겨졌던 오찬 분위기는 금세 싸늘해졌다.

인사말이 오간 뒤 환구시보의 후시진(胡錫進)기자가 일어서더니 대뜸 "서울에 오니 한국인들이 고구려사 문제에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게 정말 뜻밖이었다"고 운을 뗐다.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한국의 반발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였다.

후 기자는 "중국인들은 오히려 한국인들이 역사를 바꾸려 한다고 생각한다"며 작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 "한국이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하거나, 단오절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게 대표 사례"라고도 했다. 그는 "인쇄술과 단오절은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이라며 "중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진의가 뭔지 매우 의아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아있던 동료 기자들과 중국 외교부 간부들도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엔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박준우 국장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한국민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을 받았다. "고구려는 한민족의 뿌리이자 우리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라며 "고구려에 대한 한국민의 믿음은 신앙과도 같은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는 "한국민은 어려서부터 광개토왕.장수왕 등 고구려의 위대한 임금과 을지문덕.연개소문 등 명장(名將)의 얘기를 수없이 듣고 자란다"며 "이런 고구려 역사를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고 왜곡하는 중국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당국자도 "한국은 금속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단오'라는 절기 자체가 아니라 수백년간 이어져온 강릉의 독특한 단오절 행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 측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30여분 동안 한치의 양보 없는 설전을 지켜보며 '큰일이구나'싶었다"며 "중국 외교부 간부와 주요 언론사 기자들조차 이렇게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고 걱정했다. 이어 한 시간 동안 식사가 이어졌지만 분위기는 이미 썰렁해진 뒤였다.

외교부는 오찬 직후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박 국장을 5~7일 중국으로 보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키로 결정했다. 한 관계자는 "내부 토론 결과 차분한 대처보다 '이번엔 제대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많았다"며 "양국 간에 어느 정도의 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박신홍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