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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게 죽고 싶다’ 자신의 뜻을 증명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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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호 06면

지난 2월 9일 명지대 용인캠퍼스 내에 위치한 실버타운 ‘명지엘펜하임’에서 한 입주 회원이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날 이곳 회원 66명은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적용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담은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하고 함께 변호사의 공증을 받았다. [사진=명지엘펜하임 제공]

#1.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윤리위원회는 지난달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 A씨의 가족이 제기한 인공호흡기 제거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난해 ‘존엄사 논쟁’을 불러일으킨 김모(77·여) 할머니 소송이 시작되면서 만든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3단계 기준’을 적용한 결과였다. 말기환자였던 A씨는 수술 중 상태가 악화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 ‘심각한 뇌손상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며 주 질환의 회복이 불가능한’ 2단계 환자였던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첫 단추, 사전의료지시서

병원 지침에 따르면 이 단계에선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가 필요하며, 치료 중단 시 가족의 동의와 병원윤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했다. A씨는 김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공증을 받거나 다른 사람이 입회한 가운데 자기 의사를 표현한 문서가 없었다. 대신 가족은 A씨가 수술 전에 혼자 써놓은 것 같다는 한 장의 문서를 들고 왔다. ‘수술이 잘못될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받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병원윤리위원회는 50만원가량 드는 필적 감정까지 거친 끝에 결국 이것이 A씨의 뜻이라고 인정했다. A씨는 자발적 호흡을 회복한 김 할머니와 달리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 사망했다.

#2.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말기 암환자 B씨의 가족은 지난달 말 의료진으로부터 B씨를 임종실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와 함께 주치의는 사전의료지시서를 쓰도록 권했다. 서울대병원은 의료윤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 5월 15일부터 ‘말기 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 제도를 공식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의료진의 입회 아래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등의 연명치료를 원하는지 명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씨의 가족은 이미 의식 불명인 B씨의 대리인으로 연명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지시서에 서명했다. B씨는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를 이용하지 않은 채 지난 1일 사망했다. 7일 현재까지 서울대병원에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한 말기 암환자(가족)는 모두 21명. 이 가운데 B씨를 포함한 10명이 지시서에 명시한 대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삶을 마감했다.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들에 대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공식적으로 중단하거나 아예 시행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5월 21일 대법원이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김 할머니에 대해 가족이 요청한 대로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한 판결이 계기다. 하지만 여기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환자 스스로 연명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결정했다는, 혹은 그런 의사를 가졌다고 추정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대표적인 형태가 사전의료지시서다.

생명권보다 자기선택권 중시
김 할머니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서 가장 강조된 두 가지 개념은 ‘자기결정권’과 ‘사전의료지시’였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허대석(서울대 의대 교수·혈액종양내과) 원장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해서는 단순한 생명권보다 행복추구권을 우선시해 의료적 처치를 환자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판결은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사망 단계의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신체침해행위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고 ▶이러한 자기결정권은 환자가 의사결정능력이 있을 때 미리 의료인에게 충분한 설명을 듣고 작성해둔 문서 형태의 사전의료지시를 통해 인정받을 수 있으며 ▶만약 요건을 모두 갖춘 사전의료지시가 없는 경우에는 평소 가족·친지에게 한 의사 표현이나 종교·생활태도 등을 고려해 객관적으로 의사를 추정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사전의료지시서와 같은 문서는 남기지 않았지만 “의미 없는 생명연장을 위한 어떤 조치도 하지 말아 달라” “인공호흡기는 절대 안 된다”는 등의 말을 남겼다. 이를 김 추기경의 대리인 역할을 한 정진석 추기경이 의료진에 공증해 줌으로써 임종과정에서 김 추기경에게는 인공호흡기를 쓰지 않았다.
공인이었던 김 추기경에 비해 김 할머니는 추정 의사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법원은 김 할머니가 평소 가족에게 “내가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호흡기는 끼우지 말라”고 얘기했다는 것 등을 연명치료를 거부했을 만한 의사 표시로 인정했다. 만약 김 할머니가 지난해 2월 의식을 잃기 전에 만들어둔 사전의료지시서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가족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때부터 대법원 판결을 거쳐 6월 23일 실제로 인공호흡기를 떼기까지, 김 할머니가 13개월 이상을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연결된 채 홀로 누워 있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b>故 김수환 추기경 "호흡기 끼우지 말라"
김 할머니 소송이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 일반 노인들 사이에서도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명지대 용인캠퍼스 내에 있는 실버타운 ‘명지엘펜하임’의 거주회원 66명은 지난 2월 초 단체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고 공증을 받았다. 같은 엘펜하임 회원인 죽음준비교육 전문강사 이윤(75)씨로부터 ‘웰 다잉’ 강좌를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이들은 강좌에서 사전의료지시서를 알게 됐고 김 할머니와 비슷한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두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이씨는 “본인이 썼다는 사실 관계를 확인해둘 필요가 있어 공증사무실에 출장을 오도록 하고 회원들에게 공지를 했는데 예상 외로 66분이나 모이셨다”며 “노인들이 사전의료지시서에 직접 서명을 하고 공증을 받겠다고 쭉 줄을 서신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에게 품위 있는 마지막을 보이고 싶은 노인들의 소박한 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했다.

이런 일반 노인들의 움직임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사실 국내에는 말기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연명치료의 구체적인 범위나, 사전의료지시서가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작성 절차 등에 관한 공인된 기준이 아직 없다. 따라서 오히려 혼란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엘펜하임 회원들이 이용한 사전의료지시서 양식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의 예시안 중 하나로, 완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는 인위적인 영양공급도 거부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교 입장과 배치된다.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의 이동익(신부) 원장은 “가톨릭교에서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지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며 “그러나 영양이나 수액공급은 특별한 연명치료가 아니라 통상적인 의료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것은 자살적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의 예시안을 만든 김건열(전 서울대의대 교수, '존엄사' 저자) 임사의학연구회장도 “나와 같은 노인용으로 만든 것이라 기력이 다했을 때는 항암화학요법을 거부할 수 있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며 “국가 생명윤리위원회 등이 나서서 사회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표준안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회의 입법안이나 정부·의료계에서 연명치료 중지 관련 지침안을 논의할 때 사전의료지시서의 내용과 작성 절차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필요성 때문이다. 지난달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의료계·생명윤리계·언론계 등의 대표들과 세 차례에 걸친 토론회를 통해 사전의료지시와 관련해 합의한 내용을 보면, 우선 ▶영양수액 공급과 통증조절 등 기본적인 의료행위는 유지돼야 하고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적용은 환자가 사전의료지시서를 통해 거부 의사를 밝힌 경우 중단될 수 있으며 ▶다른 의료행위에 대해서는 환자가 사전의료지시서를 통해 본인의 의사를 피력할 수 있지만 최종 결정은 의료진이 의학적 판단에 근거해 진료현장에서 내릴 수 있도록 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조만간 지침을 만들어 발표할 예정이다.

연명치료 범위, 사회적 합의 필요
문제는 이러한 기준이 마련된다 해도 얼마나 의료현장에서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전의료지시서 작성을 강제하긴 어렵다. 1991년 미 연방법인 ‘환자의 자기결정권법(Patient Self-Determination Act)’을 제정해 사전의료지시서 작성을 여러 방식으로 권장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실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16~26%에 불과하다(2007년 보건서비스국 보고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가족 중심적인 유교적 문화 때문에 의료진이 환자에게 말기임을 정확히 통보하는 일조차 가족의 반대로 차단될 때가 많다. 의사들도 환자와 직접 얘기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다가 환자가 의식을 잃고 나서야 가족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울대병원에서도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작성된 사전의료지시서 21건 가운데 본인이 쓴 것은 7건에 불과했다.

또 여론조사 때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의료지시에 찬성한다는 이들도 실제로 지시서에 서명하는 일은 꺼리는 일이 많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언제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고령 환자들에게도 그런 상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어 사전의료지시서를 받기가 쉽지 않다. 현재 폐렴증세로 기관 절개술을 한 채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김대중(83) 전 대통령도 최악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아무도 사전의료지시서에 대해 설명하거나 작성을 권유할 의무는 없다.

대한의사협회 이윤성(서울대 의대 교수·의료윤리) 부회장은 “연명치료 중지에 관한 사전의료지시제가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말기 환자들에게 직접 상태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며 “이는 가족과 의사들의 인식이 함께 바뀌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건열 임사의학연구회장도 “사전의료지시의 표준안을 마련하는 것만큼이나 이후 그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교육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medical directive)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비해 특정 치료의 지속이나 중지에 관한 의사를 의료인이 알 수 있도록 미리 밝혀 놓은 문서. 주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이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적용 등 무의미한 연명 치료 거부의사를 명시할 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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