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무너지는 과학·기술 기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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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와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정부출연 연구기관과 기업연구소들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석.박사급 고급두뇌들이 줄줄이 해고되는가 하면, 연구소들의 연구개발비도 대폭 삭감돼 연구기능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의 메카로 불리는 대덕연구단지의 경우 올 들어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만 고급두뇌 4백50여명이 연구단지를 떠났고 민간연구소 연구원들까지 합하면 모두 1천여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대덕단지의 '공동화 (空洞化)' 라는 말이 실감난다.

한때 폭발적 증가세를 보이던 민간연구소들은 모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전국적으로 52개가 문을 닫거나 조직이 축소됐다.

더욱 기가 찰 일은 남아 있는 연구원들의 79%가 '신분보장이 되지 않고 연구의 자유가 없다' 는 이유로 연구소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등 기술선진국들은 불황기일수록 연구개발 (R&D) 투자를 오히려 늘리는 경향이다.

미국은 80년대 구조조정 와중에서 첨단정보통신 분야에 연구개발비를 집중시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일본의 유수기업들 또한 현재의 극심한 침체 속에서도 연구개발비만큼은 착실히 늘리고 있다고 한다.

당장의 어려움 때문에 연구개발투자를 계속 줄인다면 3~4년뒤 우리 산업계의 기술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실의에 찬 젊은 고급인재들이 해외진출을 서두르고, 외국회사들은 낮은 임금으로 한국의 고급두뇌들을 고용할 수 있어 두뇌유출이 꼬리를 물고 있다.

어느 일본 기업은 최근 서울사무소에서 2백60명을 채용해 그중 10명은 일본 본사로 보내 근무케 하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다.

연구소내의 관료적 체제, 그리고 성공에 따른 보상보다는 실패에 대한 처벌 위주의 연구분위기 등 연구문화의 빈곤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최근 외국의 한 투자자문기관은 한국의 '우물안 개구리식' 연구문화의 사례로 '외국에서 첨단연구를 하고 온 고급두뇌들도 귀국후 1~2년내에 다시 한국 문화로 되돌아오며 관리직이나 행정직 등 연구와 관계없는 직책을 즐겨 갖는' 점을 들었다.투자규모도 중요하지만 젊은 세대의 잘못된 교육과 기업문화로부터의 탈피가 한국 경제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충고다.

우리 문제의 원인과 처방을 남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하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도 최근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과학기술로 나라를 세운다는 정신으로 나아가자" 고 역설한 바 있다.

핵심역량에 대한 R&D투자와 새 연구문화를 창출하는 장.단기 실천대책을 서 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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