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클린턴, 195분 김정일 ‘탐색’ … 북·미관계 변화 대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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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의 북한 방문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는 것인가. 미국 정부는 북핵과 기자 석방은 별개의 것이라고 확실히 선을 긋는다. 미국은 클린턴이 두 기자와 함께 귀국하는 것으로 미국 기자 억류 상황은 끝났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확연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클린턴의 방북이 두 기자의 석방 외에 완고한 벽에 부닥친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라면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 국면에 혼선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김정일과 클린턴이 만난 시간이 회담 75분에 만찬 120분, 모두 3시간15분이다. 긴 시간이다. 기자 석방은 사전에 뉴욕 채널을 통해 원칙적인 합의가 성사됐다. 북한의 체면을 살리는 수준의 인사가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오는 문제만 남겨 놓고 있었다. 북한은 클린턴의 방북을 원했다. 논리적으로 무리가 없다. 클린턴은 1994년 북한과 핵 문제에 관한 제네바합의를 성사시키고, 2000년 10월에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자신의 연말 방북을 논의한 장본인이다. 클린턴은 그런 일로 북한에 가기에는 지위가 너무 높다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갔다.

김정일·클린턴이 회담하는 사진을 보면 김정일은 웃는 모습인 데 반해 클린턴은 포커 페이스다. 클린턴은 오바마 대통령의 뜻에 따라 자신의 방북이 확대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김·클린턴 회동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저마다의 노림수가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에게 클린턴 방북은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요,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찾아와 두 기자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데 대해 사과하고 선처를 호소했다고 국민에게 선전할 호재였다.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야 하는 김정일로서는 군부와 당의 충성과 지지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북·미 관계를 개선해 국제사회에서 정상적인 일원으로 대접받는 것이 충분조건의 하나라면 그 첫걸음은 미국과 관계 개선이다. 북·미 관계의 실세인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가 회담과 만찬에 참석한 것은 김·클린턴의 만남의 목적이 기자 석방 이상이었음을 시사한다. 대남 관계를 지휘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김양건이 회담과 만찬에 모두 참석한 것도 시선을 끌었다. 한국 정부는 클린턴에게 답답하게 막힌 남북 관계의 현황, 개성공단에 억류된 한국인과 납북 어부들의 문제를 전달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클린턴이 김정일에게 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 관계 개선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설명했다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클린턴은 무엇보다도 북·미 관계 개선의 절대적인 전제는 검증 가능하고 뒤집을 수 없는 방식의 핵 포기라는 데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클린턴의 방북은 오바마 정부에는 김정일의 건강과 권력 이양에 얽힌 군부와 당과 정부의 입장을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였다. 오바마 정부는 이미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은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적인 지원을 한다는 포괄적인 패키지를 제시해 놓고 있다. 아마도 클린턴은 미국의 이런 입장을 설명하고 김정일의 반응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북 제재의 틀 안에서도 미국의 대북 정책은 의미 있는 조정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 핵 포기에 관한 기존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한 미국이 지금의 제재 국면을 풀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그러나 만물유전(萬物流轉)이다. 기세 좋게 출발한 제재도 북한을 굴복시키기 전에 작은 동기로 힘을 잃을 수 있고, 북한의 핵 포기 요구도 일정 수준에서의 동결로 후퇴할 수 있다. 94년 제네바합의가 사실상 그런 것이었다. 북·미 관계와 북핵 문제는 앞으로 클린턴 방북 이전과는 다르게 진전될 수도 있다. 무엇이 핵 문제 해결인지에 관해 한·미 간에 의견이 갈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남북 관계 개선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서 북·미 관계 개선을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고 경계한다.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북·미 관계 개선이 남북 관계 개선보다 몇 걸음 앞서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8·15에 대통령의 의미 있는 대북 제의를 기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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