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일본 영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얼마전 세상을 떠난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黑澤명) 감독이 영화의 정의 (定義) 를 이야기할 때 후배와 제자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소설가의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 소설가는 손자가 쓴 어떤 글을 '당대의 가장 빼어난 산문 가운데 하나' 라며 문예지에 싣게 하기도 했는데 '나의 개' 라는 제목의 그 글은 "내 개는 곰을 닮았다.

그것은 또한 오소리를 닮았다.

그것은 또한 여우를 닮았다…" 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개의 특징을 다른 동물과 비교해 열거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이기 때문에 개를 가장 닮았다. "

구로사와가이 글을 인용한 까닭은 '영화는 아주 많은 다른 예술을 닮았다' 는 영화적 속성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문학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기는 하지만 연극적 특성, 철학적 측면, 회화와 조각의 속성, 음악적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로사와의 영화의 정의에 대한 결론도 늘 이렇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영화다. "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 속에는 진리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곧잘 도취하고 감동을 느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자체에 대한 것일 뿐 영화 외적 (外的) 인 어떤 것에 대한 도취나 감동은 아니다.

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쉽사리 혼동한다.

일본 영화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만 해도 그렇다.

일본 영화는 단지 일본 영화일 뿐 하늘나라의 영화나 도깨비 나라의 영화가 이니다.

그러나 일본 영화 수입에 대해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똑같이 영화 외적인 요소가 깃들여 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찬성파의 일제 (日帝) 체험 세대에게는 야릇한 향수 (鄕愁) 의, 미체험 세대에게는 막연한 호기심의 낌새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파의 상당수는 문화적 침식을 우려하는 맹목적 기피증에 휩싸여 있다.

그런 외적인 요소들을 배제한다면 오늘날 일본 영화의 수준을 놓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전후 (戰後) 최고의 일본 영화 1백50편을 가려 뽑은 어떤 책자를 보면 최근의 영화는 거의 없고 모두가 20년전, 30년전의 영화들이다.

일본 영화 개방스케줄 발표로 국내 영화계에 비상이 걸렸지만 관건은 어떻게 질 (質) 로써 맞서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 영화는 그저 일본 영화일 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